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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히로시마 내사랑>(1959) 스틸컷 (출처 : 네이버 영화)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그린 히로시마는 중의적인 곳이다. 일본의 도시 이름이자 사랑하는 이에게 붙인 이름이고, 사람이 사람을 죽여 폐허가 된 공간이자 사람이 다시 사람을 살리는 회복의 공간이다. 무엇보다 소설의 주인공 ‘그녀’에게는 옛 사랑이 끝나는 공간이자 새 사랑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처럼 중의적이라 매혹적일 수밖에 없는 공간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만나요.

당신을 기억해요.

이 도시는 사랑에 꼭 맞게 만들어져 있네요.

당신은 내 몸하고 꼭 맞게 만들어져 있네요.

당신은 누군가요?

……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는 마치 도시를 바라보듯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아주 다정하게 그 이름을 부른다.

……

“히-로-시-마. 이게 당신 이름이에요.”

사랑이 공간과 가깝게 밀착되어 있는 문학 작품이 몇 있다. 이탈리아의 피렌체, 특히 두오모 성당은 어느 샌가부터 『냉정과 열정 사이』의 쥰세이와 아오이의 사랑의 상징적 공간이 되었고, 체코의 프라하는 자연스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토마시와 테레자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개선문』에서는 히틀러로 인해 전운이 감도는 유럽 대륙의 마지막 피난처가 된 파리의 개선문 아래에서, 의사 라비크와 아름다운 여배우 조앙 마두의 사랑이 그려진다. 무엇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쓴 또다른 작품, 베트남 메콩 강을 배경으로 반항적인 프랑스 소녀와 부유한 중국 청년의 사랑을 그린 『연인』도 빼놓을 수 없다.

사랑은 일차적으로 두 사람이 한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공유하며 발생하는 것이기에, 사랑을 반추할 때 특정 공간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그렇지만 2017년의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한 시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사랑의 필수 조건이라 하기에는 지구는 너무도 가까워졌고, 지구상의 모든 장소에서, 모든 시간대에서, 모든 이들이 사랑을 나누는 것이, 또한 사랑의 끝을 고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라는 것을. 그럼에도 장거리 연애(long distance love)가 힘든 이유는, 사랑하는 대부분의 이들이 공기처럼 호흡하는 친밀한 육체적 밀도과 장소의 분위기를 제공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치밀해지고 형이상학적으로 섬세해져야 한다는 것을 안다. 공간이라는 요소가 사라진 사랑은 그것을 대신할 것을 찾아 채우려는 결핍에 대한 투쟁이 되어 버리기 십상이라, 애인들은 종종 사랑에 실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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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단 며칠간뿐인, 끝이 정해진 사랑에 빠져 버린 두 남녀의 모습을 본다. 이들은 한 방에 머물고 한 도시의 공기를 동시에 호흡한다. 이들의 사랑은 현재 영원하다. 그녀가 파리로 다시 떠나게 되면 사랑의 연결이 더 이상 불가능하기에 이들은 지금 이 순간 더욱 애절하다.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영원히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동시에 한 공간에 함께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채워진 두 사람의 사랑……. 한정된 시공간은 이렇게 사랑을 더욱 불타오르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하지만 아무도 이들을 어리석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민음사 편집부 허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