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해가 지는 곳으로』 “사랑이 승리할 수 있도록”

전염병 대유행이 인류의 문명을 파괴하고, 질병의 마수를 피해 황무지로 사람들은 약육강식의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버텨야 한다. 『해가 지는 곳으로』는 일단은 포스트-아포칼립스 장르의 전형적인 설정을 수용한 소설이다. 그러나 최진영이 이 소재를 선택했다면 거기에는 이 장르의 전형성을 벗어난, 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최진영은 방랑과는 거리가 먼 삶을 그려 온 작가였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그간 외적 세계를 확장하고 모험하는 데에는 좀처럼 관심이 없었다. 최진영의 세계는 미처 덜 자란 가시를 가진 고슴도치들의 작은 마을 같았다. 특출난 악당 하나 없이 불행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졌고, 고슴도치들은 혼자 또는 둘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긴 밤을 보내곤 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생각하고 독백하고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보통의 글에서라면 고심 끝에 쫓겨났을 감상적인 독백과 이러저러한 비유들, 일견 비경제적인 표현들은 최진영이 만들어 놓은 길고 고독한 밤 어딘가에 연달아 불시착했다. 최진영은 새나 비행기가 아니라 북극성이며 관제탑이다. 이 작가는 기나긴 밤 속에 앉아 끊임없이 메시지를 수신하고 그 메시지들이 내려앉도록 불행과 불면이 선사한 드넓은 내면을 내어 주곤 했다.

그러나 『해가 지는 곳으로』에서는 떠나야 한다. 전염병이 돌고, 그로 인해 무법천지가 된 이 땅에서는 살아남기가 어렵다. 최진영의 세계에서 이는 (불가피하지만) 놀라운 도전이다. 수신하며 살아가던 이들이 움직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를 거쳐 동유럽으로 빠져나가려는 이 여정에서 이 고슴도치들, 수신하는 자들은 노골적으로 멸시당한다. 이 세상의 기준에서 그들은 약자들이다. 생존에 대한 결정권과 그에 따른 행동을 할 권리는 성인 남자들에게 있고, 여성과 약자들은 혈연 따위로 엮이지 않은 이상 짐짝이거나 사실상의 노예로 전락한다. 그런데 이 지옥 같은 그림은 어쩐지 낯설지만은 않다. 이 지옥은 현실을 증폭시킨 것이다. 한국의 평범한 사회관을 가진 남성들로부터, 정상 신체를 갖춘 이들로부터 잉여의 존재로 취급받아 온 이들은 이미 최진영의 앞선 소설들 속에서 언제나 압박받아 오고 있었다. 그 압력은 현대 사회가 붕괴한 『해가 지는 곳으로』의 세계에서 더욱 증폭되어 급기야는 직접적인 폭력을 무분별하게 행사하기까지 한다. 쓸모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쓸모없는 존재들을 마음대로 처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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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화자를 나누어 담당하는 이들은 모두 약자들이며, 이들은 이미 평범한 한국 사회에서 움츠러든 채 경계하는 법을 학습한 인물들이다. ‘남자들’이 무모한 희망을 걸고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국경이 폐쇄된 동유럽으로 전진하려고 할 때, 소설의 화자를 담당한 여자들은 그 낙관적인 결정이 가져 올 파멸을 예감한다. 약자의 입장을 경험하지 못했던 남자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약자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이 지옥을 헤쳐 나가는 이들은 강인한 남자들이 아니라 지옥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핍박을 받아 오던 이들이다. 그들은 환난이 시작되기 전의 세상에서 이미 고난을 내면화하고 미치지 않은 채 살아가는 방법들을 꾸준히 개발해 왔다. 여자들. 아이들. 여자마냥 쓸모없는 남자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메시지를 수신하며 끝없는 밤의 길이를 가늠하던 사람들. 이들은 온갖 종류의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죽거나 미치지 않은 채로, 자기 자신을 유지한 채로 살아남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왜 살아남기를 원하는가. 작가는 명쾌한 답을 준비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를 안전하고 행복한 곳에 데려다주고 싶고, 그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면서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기 때문이다. 동생을 사랑해서, 아들을 사랑해서, 자신을 구해 준 여자를 사랑해서 이들은 살아남으려 한다. 이 사랑들은 소설 속에서 시작하는 지점들이 모두 다르며 도착하는 지점들도 제각각이다. 피난길에 만난 두 소녀는 서로 사랑에 빠지고, 소년은 그 중 한 소녀를 짝사랑한다. 사실상 애정이 사라져 버린 부부는 아이 때문에 억지로 힘을 합치다가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이들 중 누군가는 함께, 누군가는 혼자 떨어져 나가 소설의 말미에 이른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랑의 모습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시급한 압력 속에 놓였다는 것이다.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삶을 살면서는 오늘의 사랑을 미룰 수가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기존의 일상 속에서 기약 없이 미래로 내동댕이쳐졌던 사랑은 매일 새롭게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억압이 가시화되었으므로 그에 맞서 사랑도 가시화됐다. “사랑을 품고 세상의 끝까지 돌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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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낭만적인 이야기인가?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의 평균치에 대입하면 확실히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진영의 소설들은 언제나 ‘평균’의 세상과 불화하는 낭만적인 이들의 세계를 그려 왔다. 평균의 세상에 곧잘 섞여들지 못한 채로 매일을 살아가기 위해 때로 마음을 닫기도 하고, 때로는 가면을 쓴 채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이었다. 이 고독한 이들이 자신과 닮은 사람을 만났을 때,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피어오르는 사랑은 이들이 가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능동적인 에너지였다. 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상 속에서 퇴색되고 일그러질 사랑이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움츠러든 채 방어하듯이 살아오는 삶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는 그뿐이기 때문이다.

『해가 지는 곳으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고독하고 섬세한, 사랑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이들은 끝내 버팀으로써 살아남아 역전을 이루어 낸다. 누군가를 짓밟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머묾으로써 이긴다. 지금 이 세계에서는 좀처럼 (어쩌면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꿈이다. 그래서 이 소설 속의 악몽 같은 세상은 어느 순간 기이하게도 사랑이 승리할 수 있도록 일부러 오늘의 세계를 무너뜨려버린 것처럼 보인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현실 아래에 깔린 채 꾸는 아름다운 악몽. 최진영은 꿈을 꾸듯 혹은 소망하듯(어쩌면 이 둘은 같은 뜻일까?)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늘 우리를 버티게 해 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썰물처럼 사랑을 긁어내고 ‘우리들’을 옥죄어 오는 일상은 언제나 최종적인 승리를 앗아 가곤 했다. 그래서 최진영이 포스트-아포칼립스라는 소재에 다다른 건 생각보다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여기에서라면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일을 기약하지 못함으로써 매일 사랑을 갱신하고, 그것을 억압하고 비웃던 이들이 자신들의 맹점을 자각하지 못한 채 죽은 뒤의 새 땅을 함께 천천히 걷는 것이다. 『해가 지는 곳으로』는 사랑을 꿈꾸는 소설이다. 지독한 악몽을 대가로 지불하고서라도 만나고 싶을 만큼 절실한, 그러나 그만큼 눈 뜬 세상 속에서는 다시 찾을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을.

알라딘 해외소설 MD 최원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