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의 임무 입체북

 

 

『비평가의 임무』는 지금은 퇴사하신 나의 옛 팀장님이 편집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밝힐 수는 없지만, 팀장님에게 들은 편집 비화 하나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비평가의 임무』는 영국의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과 신진 영문학자 매슈 보몬트의 대담집이다. 테리 이글턴이라면 재기 넘치는 서평 모음집 『반대자의 초상』(이매진, 2010)밖에 읽지 않은 나는 막연하게 이글턴이 젊다고 생각했다. 막 나온 『비평가의 임무』를 팀장님에게 건네받자마자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실존주의, 구조주의,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등 큰 담론들을 거침없이 평가하고 데리다, 벤야민, 라캉, 제임슨, 지젝 같은 수많은 이론가들을 특유의 삐딱한 유머를 섞어 논평하는 태도가 한국에서는 ‘젊은 혈기’라는 말에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팀장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테리 이글턴은 이메일을 쓰지 않아 한국어판 서문 의뢰를 편지로 했다는 것이었다. 집 주소를 알려 준 에이전시에서는 수취 확인을 보장하지 않았다. 옛날처럼 우편으로 원고 청탁을 넣어 두고 기다리던 어느 날, 편지지 두 장에 빽빽하게 쓴 글이 도착했다. 이 얘기를 듣고 이글턴의 생년을 찾아보았다. 1943년, 만 72세였다. 「왜 나는 이메일을 안 쓰는가」라는 한 칼럼에서 그는 ‘불편해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샤워도 마찬가지로 문제긴 하다. 나는 비가 오길 기다렸다가 빗속으로 달려 나가서 잔디밭을 구른다.”

테리 이글턴의 트레이드마크는 유머라 할 수 있다. 간혹 너무 지적인 농담이라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이글턴이 해체론을 비판하면서 데리다의 이름으로 말장난을 친 시(“Der der, deary didi! Der? I? Da! Deary? da!/ Der I, didida; da dada, dididearyda. ……”)는 『비평가의 임무』에서 팀장님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다. 이 말장난에 대해 데리다(1930년생)가 “다소 화가 났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이글턴은 회상하는데, 한국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면 결코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글턴은 남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만큼 자신을 향한 비판에도 여유 있게 대응한다. 예컨대 “집을 세 채나 가졌으면서 투쟁을 논한다.”라는 식의 인신공격에 “개집까지 합치면 세 채가 될지 모른다.”라고 응수한다면,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투쟁만 다루기에 페미니즘의 중요성을 보지 못한다는 비판은 깊이 받아들여 좌파 운동에서 ‘성’의 문제를 사고하게 된다. 이처럼 다양한 이론을 소화하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는 비평가 이글턴을 두고 이 책의 옮긴이 문강형준은 “현재의 상태에 맞서 글로 싸우는 자”, 곧 ‘전사(戰士)’라고 일컫는다.

현 체제의 문제에 맞서는 비평보다 작품을 순식간에 수량화하는 별점평이 인기 있는 오늘, 비평가가 대중에게 잔소리하는 꼰대 내지는 화기애애한 자리에 덕담을 얹는 주례쯤으로 괄시받는 시대에 ‘비평가의 임무’란 “해야 할 말을 끝까지 해내며 싸우는 일”이다. 나로서는 전사라는 말을 ‘키보드워리어’ 할 때의 ‘워리어’라 번역하고 싶다. 이 책이 많이 읽혀서 한국 사회에서도 얼굴 붉히지 않고, 고소하지 않고, 울지 말고 웃으면서 신나게 논쟁하는 워리어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하는 것이 팀장님과 나의 바람이다.

 

민음사 편집부 신새벽

* 이 글은 《출판저널》 2015년 12월호에 먼저 게재되었습니다.

연령 15세 이상 | 출간일 2015년 10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