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집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지

 

 

한편 13호 ‘집’ 표지 대공개
처음 쓰는 기획 편지예요. 새해 첫 레터에 반응이 뜨거워서 기뻤습니다. 저는 그사이 출판인의, 출판인에 의한, 출판인을 위한 잡지인 《기획회의》 원고를 썼어요.(599호 완전 재밌어 보이죠) 2020년부터 발행해 온 바로 이 ‘한편의 편지’의 뉴스레터 마케팅을 돌아보는 글이었는데요. 여기에 이 얘기 저 얘기 다 쏟아부은 터라 텅 빈 것만 같네요. 이럴 때는 이미지로 돌파…… 갓 나온 《한편》 새 표지를 보시죠.
유진아 디자이너가 ‘집’ 호를 위해 선택한 건 녹아내리는 빙하를 폰트로 표현한 기후위기체예요. 핀란드 헬싱키의 신문사인 헬싱긴 사노마트에서 기획하고 제작한 ‘기후위기폰트: 라틴’의 한글 버전입니다. 미국 국립 빙설자료센터에서 제공한 빙하량 데이터를 바탕 삼아서 제작했다고 하는데요. 기후의 위기, 위기의 집, 녹아내리는 집…… 등등을 떠올리며 편집부 모두 1안으로 꼽았네요. 종이잡지에는 물론 움직이는 이미지가 아니라 빙하가 꽤 녹은 중간 단계의 ’2019′ 타입을 쓸 건데요. 이런…… 엄청 슬퍼지네요.
집…… 지금 ‘집’ 마감을 앞두고 집이 뭔지, 집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최고로 감을 못 잡고 있는데요. 집 생각하면 그저 실전뿐. 집에 가서 뭐 먹지, 다음 이사 어디로 가느냐, 지난 집주인에 대한 분노? 같은 실천편만이 떠올라서요.(일부는 ‘집’ 호에 반영됨)
제가 사는 집에서 샛강역으로 출근하는 길에 한동안 이 <고려거란전쟁>의 대형 포스터가 붙어 있었어요. 그렇게 세뇌되어서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극중에서는 ‘고려=우리 집’이라는 설정이 디폴트인 것이었어요. 고려 시대는 이른바 민족의식이 형성되던 때 아닌가? 그 계기가 거란의 침입이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드는 거죠. 현종(포스터에서 눈물 흘리는 김동준 분)과 강감찬(최수종 분), 양규(아아……) 등은 그런 질문 따위 던지지 않지만, 충주의 호족인 박진(이재용 분)이 계속해서 왕을 미워하고 죽이려 들면서 그나마 입장 차이를 보여주고 있어서 주목됩니다.
‘집’ 마감 한창인 지금…… 이제 참고 도서를 읽으며 우회할 여유는 없고 ‘편집 직진’일 뿐입니다. 그래도 이번 호 표지를 상의하며 집 호에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인데요.
연말 내내 바깥을 나돌아 다닌 저는 요즘 부쩍 집이 좋아졌어요. 평일 저녁이고 주말이고 그저 집에 있고 싶다, ‘집에서 맛있는 거 차려서 재밌는 것 보는 게 최고의 쾌락이다’ 생각만 되뇌는데요. 그렇게 칩거하며 한동안 따라가지 않은 유튜브 채널들을 챙겨 봤답니다.
개인적으로 신동엽 분(‘놀토’의 영향)과 홍진경 님(그저 찐천재)을 좋아하는데…… 한 달 전쯤 <서울의 봄> 프로모션 기간이었는지 주연 배우들이 두 채널에 각각 출연하고 있었어요. ‘짠한형 신동엽’ 채널이야 콘셉 자체가 술방이니 삼사십 분을 넋 놓고 보았는데, ‘공부왕 찐천재’ 쪽은 생각지 못한 내용이 나와서 놀랐지 뭐예요. 아니아니 갓진영 선생님이 주연 배우 인터뷰 전에 한국사 선생님을 초대해 ‘<서울의 봄> 시대 배경 알아보기’ 미니 강의를 연 것이에요. 비슷한 내용을 이렇게 다르게 푸는 데 새삼 놀라고, 유튜브 채널이라는 온라인 ‘공간’ 만들기란 뭘까를 생각하기도 했어요. 미니 강의 덕에 “12.12 군사 ____”의 빈칸에 사태(x) 쿠데타(x) 반란(o)을 넣는다는 습자지 정보를 얻기도 했답니다.
아아, 고려거란전쟁과 12.12 군사반란에 이어서 하나 더 생각났어요…… ‘이불봉기’인데요. 『이불 속에서 봉기하라』라는 제목을 보고 멋진 제목이라는 생각과 기노쿠니야 인문대상도 요즘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함께 들었습죠. 봉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래, 그렇게라도 해보자’ 한다면, 이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욕할 것 같거든요. 판단은 아래 대목을 보고 각자 해봅시다요.(눈치)
“‘다른 세계’로 이행하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자세를 추구하다 보면 ‘체력이 좋고 정신적으로도 강인하며 권위적인 사람만이 혁명을 선도한다’라는 마초이즘으로 향하는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 이는 반드시 피해야 할 길이다.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살아 있는 것은 무척 괴롭고 슬픈 일이다. 가뜩이나 괴롭고 슬픈데 지금의 세상에 저항하려고 하면 고통은 몇 곱절로 늘어난다. 그것은 틀림없는 일이고, 어쩔 수 없다. 살아 있는 의미도 애초에 없다. ‘행복’해지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면, 나한테는 죽을 이유밖에 없다. …… 기왕 태어났으니 다른 사람을 위해, 조금이라도 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자. 자기 자신에게 살의를 내뿜지 말자. 목을 감싼 손을 풀고, 천천히 사회를 향해 주먹을 고쳐 쥐자. 온갖 것들로 인해 궁지에 몰려 이부자리 위에 드러누운 채 꼼짝하지 못하는 몸은, 당신의 의지 하나로 봉기에 참여시킬 수 있다.”(서문 중에서)
> 새해에 열어보는 한편은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었네요. 연말에 부랴부랴 정기구독 추가로 신청하고 1호부터 쭉 함께하고 있습니다. 평소 생각하지 않았던 주제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어서 삶의 폭이 조금 더 넓어진 것 같아서 항상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고있어요. 지나온 시간들 감사했고 앞으로의 시간도 잘 부탁드려요!
> 새해가 다가오고, 새로운 형식으로 바뀌어도 어느 독자분의 말처럼 편지를 작성하시는 분들의 다정함이 느껴졌어요. 오늘도 감사히 읽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로운 양식에서는 한편의 레터를 작성하시는 분들의 다양한 경험과 다양한 책을 만날 수 있어서 더 좋아요)
> “저는 1980년대 광주와 전남을 묘사하는 이미지들을 비평하는 에세이를 편집 중인데요. 황폐화된 도시에서 어떤 이야기가 없었고 어떤 이야기는 유독 많았는지를 분석하는 이 에세이의 참고 도서로 삼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 이번 주에 광주에 다녀와서 이 부분이 반가웠어요. 얼른 책이 나오면 좋겠어요! 편집자님 화이팅!
(*밑줄은 편집자가 눈물 흘린 대목입니다.)
어머나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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