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1375일간의 편지

 

 

200회 특집 편집자 인터뷰
크리스마스 연휴는 잘 보내셨나요? 저는 눈이 오는 줄도 모르고 늘어지게 잠자며 며칠을 지냈어요. 사람 기운을 받지 못한 사무실 내부가 한층 싸늘한데요……. 여느 때보다 한산한 편집부에서 토독토독 작성하는 이 편지는 올해 마지막 편지이자 ‘한편의 편지’가 보내는 200통째 소식입니다.
2020년 3월 첫 번째 편지를 띄운 후 매주 쉼 없이 이어간 《한편》 편집부의 이야기. 지금 2만 여 독자분들이 저희의 편지를 받아 보고 계신데요. 지난주 예고한 대로 내년부터는 지금과 조금 다른 양식을 도입하려 해요. 편집자가 읽은 책에 더해 지금 만들고 있는 책, 책을 만들기 위해 참고하는 책과 기사, 온라인 콘텐츠까지 더 넓은 이야기를 소개하려 합니다.
이처럼 존재양식의 대대적인 변화를 앞두고 《한편》 편집부의 뒷이야기를 준비했어요. 바로 마케터가 묻고 편집자가 답하는 특집 인터뷰! 민음사 마케팅부에서 《한편》 편집자와 디자이너를 위한 일곱 가지 질문을 던져 주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소중한 동료의 축사까지…….역대급으로 긴 오늘의 편지, 끝까지 읽어 주시겠어요?
1호 ‘세대’ 출간과 발맞춰 띄운 첫 번째 편지의 도입 이미지.
초창기 편지들은 《한편》 본문처럼 소제목을 활용하고 있어요.
Q1. 《한편》의 주제를 선정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창간할 때 1호 ‘세대’는 금방 정했지만 2호 ‘인플루언서’ 3호 ‘환상’은 어려웠던 게 생각납니다. 특히 인플루언서는 그 당시 저에겐 사실 너무 낯선 말이었고, 다른 단어가 없을까 생각도 여러 번 했었는데(엄마에게 “인플루언서가 무슨 말이야?”라고 질문 받기도 했어요ㅎ;) 몇 년 사이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낱말이 된 것 같습니다.
그 외에는 4호 ‘동물’을 만들 때 당시 같이하고 있던 김세영, 신새벽, 조은 편집자와 넷이서 청주 동물원에 갔던 게 기억나요.
청주동물원에서 일하던 최태규 수의사 선생님을 만나러 간 거였는데, 휴관일이어서 직원 분들 외에 관람객은 저희 넷뿐이었어요. 한낮의 텅 빈 동물원에서 우리 안의 동물들을 바라보며, 오늘은 사람들이 없어 동물들이 전체적으로 다소 편한 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잊지 못할 경험이었어요. 그렇게 직접 공간을 방문한 뒤에 최태규 선생님이 보내온 원고 「동물원에서의 죽음」을 읽었을 때 매우 큰 감정의 파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쌀쌀한 초가을 청주 동물원 한 벤치에서의 대화가 생각나요. 기억을 더듬어 보면……
새벽: “은 씨는 관심 있는 주제가 뭐예요?”
은: “중독……?”
그리고 7호의 주제가 ‘중독’이 되었어요.
그 뒤로 새벽 편집자님과 대화하다 보면 문득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되는데요…… 13호 마감을 앞두고 15호의 주제를 정할 차례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해요.
또 기억에 남는 순간은 8호 ‘콘텐츠’ 출간 이후의 ‘탐구 주제를 만드는 법’ 북토크 자리예요. 미선, 새벽 편집자님과 함께한 그 자리에서 독자분들이 추천해 준 한편의 키워드들을 놓고 치열한(?) 토론을 했지요. 많은 분들이 민음북클럽 커뮤니티 게시판에 ‘나의 탐구 주제’를 남겨 주셨는데요. 사랑, 자유, 장비병…… 그리고 이동! 11호 주제 ‘플랫폼’의 탄생은 이렇게 플랫폼과 함께였네요.
Q2. 《한편》을 만들면서 혹은 ‘한편의 편지’를 발행하면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거나 영감을 받은 책 또는 서비스가 있나요?
돌아보면 《도미노》와 같은 잡지를 흠모했던 기억이 나네요. 2011년 창간호를 온라인 서점(편집자 특: 온라인 서점에 상주한다)에서 처음 봤을 때 멋있는 표지와 동인들의 이름에 주목했던 기억이에요. 아아 이 사람, 이 사람, 이 사람이 서로 친하구나, 새로운 사업을 같이 도모하는구나 하는 부러움과 질투심…… 박세진 안은별 전현우 임근준 노정태 같은 필진을 눈여겨보기도 했네요.
《한편》은 글 기반이라 《도미노》와는 달라 보이지만 새로운 사람들, 그러니까 주류와 비주류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점에서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즈음 블로그, 트위터에서 봤던 이웃과 친구들도 모조리 영감을 주는 존재들이었구요.
Q3. 가장 기억에 남는 독자 후기를 들려주세요!
뜻하지 않은 곳에서 《한편》의 찐 독자분을 만날 때 너무 좋아요. 고백하자면 저는 심각하다 싶을 정도로 제가 편집한 책 후기를 에고 서칭하는 편인데…… 유독 《한편》 후기에 목말라 있던 차에 10호 ‘대학’을 인상 깊게 보았다는 어느 시인 분의 한마디를 듣고 눈이 번쩍 뜨였지요. 기획의 어떤 면이 눈에 들어왔는지, 어느 편을 특히 재미있게 보셨는지 손 붙들고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답니다.
또 얼마 전에는 모 송년회 자리에서 가족 분들과 《한편》 아홉 권을 매일 한 편씩 읽고 감상을 나눴다는 분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한편》은 좋은 잡지”라는 진심 어린 추천의 말이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세상은 아름답다!
Q4. 필자분들께 글을 의뢰할 때나 원고를 수정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나요?
“글을 쓰는 연구자로서, 활동가로서, 작가로서…… 어떤 식으로 판단하고 계신지, 혹은 이 일에 연결되어 있는지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목소리도 함께 듣고 싶어요.” 멀찍이 떨어져서 팔짱을 끼고 가르치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야기하자는 것이 한편의 모토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꼭 이런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써 주십사 바라게 되는데, 이 부분이 항상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쓰기 싫어 일부러 안 쓴 것에 강요가 될지도 모르고…… 보통 논문을 쓰시는 분들에게는 지양해야 하는 스타일의 글쓰기로 생각되어서 어려워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그래도 독자와 함께 연결되는 방법 중 하나로 나의 경험과 감정과 가치체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설득하는 편입니다.
“글은 함께 수정할 수 있으니 혼자 너무 고민하지 마시고 같이 만들어 가요!” 사실 가장 아슬아슬한 말이기도 해서, 이 말을 꺼낼 때마다 심장이 말라비틀어지는 것 같아요.
왜 청탁하게 되었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한다…… 사실 이 구구절절에는 저 스스로도 아직 명확하지 않은 것들이 많고, 상대가 나의 질문이나 의견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정녕 알 수가 없어서 필자 미팅을 할 때마다 아직도 떨립니다. 부끄러웠던 순간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오네요…… 저는 아직도 필자 선생님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심장이 쿵쿵 떨어지는데요. 심장이 바닥에 있던 어느 날 한솔 편집자님의 조언을 듣고 배운 것이 있다면, 편집자로서 저의 경험과 자신감을 보여 주는 태도도 필요하다는 것이랍니다.
아아 세영 편집자님이 말하는 자신감…… 호가 쌓일수록 줄어들고 있는데요. 요즘 저는 멀리서 보기만 하던 사람에게 간신히 연락을 해서 만나서는 “글쓰기는 창작이니까…… 열려 있으니까요”라 말하게 돼요. ‘같이 만들어 간다’는 한편의 방침을 실현하려면 저자의 방식을 존중하고 또 편집자의 판단을 설명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다는 걸 겪으면서 말끝이 흐려지는 것 같아요. 한 친구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허둥거리는 그대로 괜찮다고 해 줬는데, 그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요?(필자를 좋아해야만 한다는 생각도 문제군요)
Q5. 마케팅 예산이 무제한으로 주어진다면 해보고 싶은 것은?
그랜드하얏트서울 그랜드볼룸에 《한편》 필자 120명과 학계 언론 관계자 등등을 초청해서 성대한 네트워크 파티를 열고 싶군요. 네이버웹툰이나 레진코믹스의 작가 초대 파티라면 숫자를 보여 주고 인기작 작가의 축전이나 굿즈 같은 것을 공유할 것 같은데, 《한편》 대축제에서는 무엇을 뽐내야 할지 고민입니다. 편집부 쪽도 고민이지만 초대 손님 편에서도 서로의 글을 읽고 자랑과 추천의 말을 쏟아내 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 해 보고 싶은 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시기에 프랑크푸르트 도심 어딘가에서 《한편》과 ‘탐구’ 특별 행사를 기획하는 일이에요. 최근 저는 책을 매개로 세계의 독자와 연결될 가능성에 눈을 밝히고 있는데… 온라인 플랫폼에서 한국과 유럽에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 팔레스타인 전쟁에 관한 책 모임을 하고, 일본 삿포로의 동네 책방에서 삿포로 시민과 한국 문학,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 사회적 재난에 관한 토크를 해 본 뒤 한국 너머의 독자/작가/활동가와 더 적극적으로 연결되어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낍니다. 한국 사회의 담론 장이 축소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면, 공간과 언어적 한계를 뛰어넘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끼리 뭉쳐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노벨상 수상자처럼 해외의 유명한 작가와 학자에게 연락하여 한편의 글 혹은 한편의 글에 대한 리뷰를 받고 싶어요.
두 분의 큰 그림! 벌써 3년 전 마지막으로 연락 드린 필자 선생님들…… 한자리에 모이는 큰잔치를 열고 서로의 근황에 대해,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일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제가 늘 멋지다고 생각하는 프로젝트가 하나의 시에 대한 여러 개의 번역을 싣는 웹진 《초과》인데요. (《한편》 11호 ‘플랫폼’에 《초과》 번역가 호영 님이 글을 실어 주셨지요.) 《한편》의 글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고, 하나의 글에 대해 여러 분의 코멘트도 받아 보고, 함께 읽으면 좋을 글을 (번역해서) 덧붙여도 보고, 한편의 글에 등장하는 장소(12호 ‘우정’에 등장하는 카페 유인원이라거나)에 가서 방문 후기도 써 보고……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한편》은 밀도 있는 열 편의 글,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에서 느껴지는 간결함이 매력인데요. 무제한 예산이 주어진다면 한번쯤 초과와 과잉의 놀이터 같은 특별판을 만들어 보고 싶네요.
Q6. 마케팅부와 편집부에서 《한편》 특별판을 만들게 된다면?
《한편》을 가지고 미디어믹스를 해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우정’ 호의 경우라면 안담의 「작가-친구-되기」를 드라마로 만들기, 이연숙의 「비우정의 우정」을 웹툰으로 제작하기, 김민하의 「정치에서 우정 찾기」를 락발라드로 편곡하기…… 협업자를 기다립니다.
Q7.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한편》의 표지와 본문 디자인의 가장 큰 철학은?
디자인 철학이라는 단어를 구글에 검색해봤어요. 디터 람스, 하라 켄야 등 대가들의 이름이 검색결과로 뜹니다. 제가 대가들이 할 법한 말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4년 전 《한편》의 시작도 떠올려 봤어요. 사실 《한편》뿐 아니라 저의 모든 작업은 출발선을 정한 뒤 연결-확장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시각적으로 보기 좋게 정리정돈도 하면서요. 《한편》의 출발선은 사유의 시작, ‘단어’에 고정되어 있어요. 저는 껍데기를 만드는 사람이라서, ‘단어’의 껍데기와 알맹이를 항상 들여다봅니다. 그건 글꼴의 모양새와 의미를 들여다본다는 뜻이고, 고민한 흔적이 독자들에게도 가닿기를 바라고 있어요.
유진아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책들. 디자이너의 최애 표지 중 하나인 ‘동물’ 호가 보여요!
‘한 해를 돌아보다’를 넘어 ’200통 세월을 돌아보다’로…… 《한편》 초기 구상부터 편집 한가운데의 고민, 가깝고도 먼 미래의 기획까지 들으니 앞으로 《한편》이 뻗어갈 길이 참으로 넓구나 싶습니다. 4개월에 한 권씩 나오는 잡지 호흡에서는 독자의 반응을 알기 어려운데, ‘한편의 편지’라는 창구가 있어 너무나 다행이고요! 이렇게 오래, 긴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편지를 읽어 주시는 여러분 덕분입니다.
인터뷰 마지막으로 《한편》 4호 ‘동물’부터 12호 ‘우정’까지 함께한 소중한 동료 조은 편집자의 축사를 덧붙입니다. “구독자분들, 잊지 말아 주세요. 《한편》 팀을 춤추게 하는 것은 여러분이 보여 주시는 반응뿐이라는 걸요…….” 편지의 묘미는 주고받음에 있으니, 오늘의 편지에 화답해 주신다면 새해를 향해 더욱 힘차게 나갈 수 있겠습니다. 그럼 모두 2024년에 만나요!
*축* 《한편》 뉴스레터 200호 ☆⸜(⑉˙ᗜ˙⑉)⸝♡
매주 수요일 아침마다 《한편》 뉴스레터와 함께 출근한 지도 3년이 다 되어 가요. 레터 만들기의 수고를 조금이나마 아는 저로서는 2020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레터를 발행해 온 동료들에게 더 크고, 더 긴 기립박수를 보내요!종이 잡지와 연계되는 뉴스레터라니, 너무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하면서 ‘구독하기’를 눌렀던 기억이 나는데요. 재밌고 알찬 콘셉트와 아이디어를 3년째 이어 오고 있는 실행력과 지구력은 더 값지고요. 《한편》 팀 너무 멋있어요! 응원합니다! 애정합니다!
뉴스레터가 200회 발송되는 동안 ‘세대’부터 ‘우정’까지 《한편》 열두 권이 출간되었지요. 가슴을 크게 열어야 품에 안을 수 있을 만한 분량입니다. 저는 4호 ‘동물’부터 까만코 사진을 달고 가끔씩 인사드렸는데요. 레터로 다른 단행본을 소개할 때나, 소개된 글에 코멘트를 달 때면 왠지 큰 부끄러움 없이 책을 편집하면서 떠올렸던 이런저런 생각이나 개인적인 경험도 털어놓게 되더라고요. 구독자분들께 전하는 편지 같은 느낌, 동료들과 나누는 롤링 페이퍼(!) 같은 느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여전히 레터를 열고 이 주의 텍스트를 읽어 가면서 편집자, 마케터, 디자이너의 코멘트가 나오기를 가장 기다립니다. 《한편》의 독자로 돌아온 지금에는 13호 표지가 공개될 때를 두근두근, 조마조마 기다리고 있어요. (편집부, 13호 마감 파이팅이어요……)
다시 한번 잡지 《한편》을 만들고, 뉴스레터 《한편》을 발행해 온 민음사 편집자, 마케터, 디자이너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구독자분들, 잊지 말아 주세요. 《한편》 팀을 춤추게 하는 것은 여러분이 보여 주시는 반응뿐이라는 걸요……. 오늘의 레터는 어땠는지 많은 의견 남겨 주세요. 이렇게 실한 《한편》 레터지만, 더한 재미와 유익함은 인문잡지 《한편》에 있답니다. 같이 구독해요!
마감이 머지 않은 《한편》 13호 ‘집’의 사전 세미나 컷
내년에는 책 만드는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 드릴게요!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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