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혁 시인의 원래 전공은 연극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과에 다니다가,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적성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서사창작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그의 시에 연극적 요소가 다분한 것이 결코 우연의 일치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한 우연의 일치는 다른 곳에 있었다.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의 담당 편집자가 연극에 있어서 도통 문외한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의 언어와 극의 언어를 대놓고 휘젓는 시인의 광폭 행보에 편집자의 머리는 적잖게 지끈거려야 했다.

시인에게 물어보았다. 무엇을 봐야 힌트를 얻을 수 있나? 연극과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는 시인은 그 적성이 다시 의심될 만큼 간명한 썰을 풀어 주었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과 외젠 이오네스코의 희곡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더 정확하게는 ‘스타니슬랍스키 연기론’이 시집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배우가 대본에 의존하여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닌, 배우의 직감 ‧ 상상력 ‧ 체험 등 본인의 모든 것을 동원해 배역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연기를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stanislavsky system)이라고 한다. 요즘 흔히 말하는 메소드 연기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연기가 가능했던 희곡이 체호프나 이오네스코이고 그것의 연출자가 스타니슬랍스키이고, 그것이 상연된 극장이 모스크바예술극장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시에서는 대체 어떤 의미인가? 김수영은 말했다. 가슴이나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시를 써야 한다고. 시를 쓴다고 해서 다 시인이 아니다. 시를 온몸으로 살아 내야 시인이다. 시라는 형식에 따라 주어진 대사와 지문에만 충실한 시인이 아닌, 배역(시) 자체가 되어 버린 시인. ‘모스크바예술극장’의 ‘분장실’에서 ‘세계를 저주’하며 ‘한 장의 거울’이 ‘구원’이라고 말하는 시인. 시인 기혁이 제33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이 세계가 작심하고 써 내려간 필연적인 희곡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앞으로 어떤 연기를 하게 될까? 그것이 무엇이든 그는 온몸으로 그걸 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적성이다.

민음사 편집부 서효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