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우주는 지구인의 것일까

 

 

먼 하늘 별과 나
모두 설 연휴 즐겁게 보내셨나요? 저는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 밥과 잠을 실컷 충전하고 왔답니다. 가족 그리고 친지와의 끈끈한 시간을 가진 한편 내 집만의 안락함을 그리워 한 며칠이기도 했지요.
지난 2주 사이 이번 ‘집’ 호를 읽어본 분도 계시겠지요? ‘한편의 편지’ 피드백 란에 남겨 주시는 감상은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있어요. 블로그,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한 후기도 참으로 반갑고요! 집의 개념을 ‘몸’에 빗대어 보는, 또 집 문제를 통해 세입자의 몸 누일 권리를 생각하는 이번 호에서 저는 역시 제가 청탁한 우주에 관한 한 편이 소중한데요. 오늘은 집이라는 관념을 저 먼 우주 스케일로 키워 보는 과학철학자 이지선 선생님의 글을 띄워 봅니다.
영화 「그래비티」*에서 주인공 라이언 스톤은 우주비행사다. 우주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비행선이 러시아 위성의 잔해와 충돌하면서 동료를 전부 잃고 홀로 남는다.** 천신만고 끝에 우주정거장에 도착해 지구와의 교신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산소 공급 장치를 끈 채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려던 순간, 앞서 떠나보낸 동료 코왈스키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코왈스키는 비록 산소 부족으로 환각 상태에 빠진 라이언에게 나타난 환영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넉살 좋은 말투로 말한다.
이봐요, 돌아갈래요 아니면 여기 있을래요? 알아요. 여기가 좋긴 해요. 시스템 다 꺼버리고, 불도 다 끄고, 눈을 감고 모두에게서 벗어나는 거죠. (……) 하지만 중요한 건 당신의 선택이에요. 계속하기로 결심했다면 그대로 따라가야 해요. 이제 똑바로 앉아 탑승을 즐겨요. 땅 위에 두 발로 버티고 서서 제대로 살아보는 거예요. 일어나요, 라이언! 이제 집에 갈 시간이에요!
일찍이 파스칼은 우주의 무한한 크기와 힘 앞에서 왜소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무력감을 말한 바 있다. 이 독특한 감응은 H. P.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로 재해석되면서 ‘우주적 공포(cosmic horror)’라 명명된다. 「그래비티」는 이 우주적 공포를 영화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전달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자막으로 다음 사실을 건조하게 전달한다. “지구 행성의 600킬로미터 상공에서 기온은 125도와 영하 100도를 오르내린다. 소리를 운반할 매체는 없다. 기압도 없다. 산소도 없다. 우주에서 생명은 불가능하다.” 이는 이후에 벌어질 우주와의 사투에 대한 예고이자 경고로 읽힌다.
실제로 인류의 지적 여정은 우주적 공포를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우주는 공포와 숭배의 대상에서 관찰과 관조의 대상이 되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실험과 개발의 대상이, 오늘날에는 탐사와 정복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우주의 범위는 지구 밖으로 계속해서 확장됐다. 4세기 전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하늘로 돌려 달의 표면과 목성의 궤도를 관찰한 이래 천문 관측은 꾸준히 발전했다. 최근에는 지구로부터 150만 킬로미터 떨어진 위치에 정착한 웹 우주망원경 덕분에 심도 우주와 초기 우주는 물론 태양계 밖 항성과 행성까지 관찰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가 하면 우주와 지구의 경계는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지구 대기권을 벗어나는 고도 100킬로미터를 경계선으로 삼는 것이 보통이었다. 인공위성과 우주정거장 등 지상에서 제작되고 또 조작되는 장치들이 수백에서 수천 킬로미터 고도를 점유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래비티」는 이렇듯 우주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달라진 상황에서 우주적 공포가 극복되기보다는 다른 종류의 감응으로 대체되었음을 보여 준다. 익숙한 대상을 갑자기 낯설게 느끼거나 반대로 낯선 대상에서 익숙함을 느낄 때의 기묘한 기분이 그것이다. 익숙한 지식과 지각을 넘어선다는 의미의 영어 단어 uncanny가 바로 이러한 기분을 표현하는데, 프로이트는 이를 집 또는 고향(Heim)의 익숙함과 편안함을 잃은 상태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 unheimlich로 번역한 바 있다. 아이를 잃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살아가는 라이언은 우주 공간을 일터이자 도피처로 삼으면서 그곳에서 집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이 구도는 영화 내내 역전과 재역전을 거듭한다. 우주 저편으로 멀어졌다가 천신만고 끝에 우주선으로 돌아와 그야말로
엄마 품안의 아기처럼 안기지만, 이내 소화기같이 익숙하게 쓰던 선내 사물들이 생명을 위협한다. 이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 이지선, 「21세기 우주인의 귀향」,
* Alfonso Cuarón, 「Gravity」(2013).
** 이 글에서 우주는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는 지구를 포함해서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사태의 총체를 의미하는 ‘우주(universe)’나 그것을 포괄하는 ‘공간(space)’을 가리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와 구분되는 ‘외부 공간’ 또는 ‘외계’로서의 우주 공간(cosmic space)을 가리킨다. 한국어는 물론 다른 언어에서도 세 개념은 혼용되는 경향을 보여 준다. 기술비평가 이영준은 “우주 감각(space sense)”을 논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다람쥐의 허파꽈리 속의 작은 공간이건 광대한 사하라 사막이건 모든 공간은 다 우주의 일부이다. 그렇다고 ‘우주탐험’ 할 때의 그 우주를 옆방 가듯이 휘릭 갈 수는 없다. 다 통해 있는 공간이긴 하지만 차원이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이영준, 『우주 감각』(워크룸프레스, 2016), 33쪽. 이러한 언어 현상은 어폐가 있다기보다 그 자체로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 또는 이영준이 말하는 ‘우주 감각’에 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 전은지, 「20,000개의 우주쓰레기 후보가 지구를 돌고 있다」, 《에피》 19호(2022).
본래 나의 집에서 좌절해 텅 빈 우주로 떠나도, “시스템 다 꺼버리고, 불도 다 끄고, 눈을 감고 모두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답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지요. 10년 전의 SF 영화에서 시작하는 이 글은 얼핏 ‘그럼에도 우주는 우주공학자만의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자아내지만 지금의 우리는 생각보다 더 우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의 소위 우주 강국들은 화성이 아닌 달 중심의 우주 탐사 계획을 현실로 옮기고 있어요. NASA와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 등 민간 우주 기업이 협업 체계를 꾸준히 만든 결과, 21세기 지구인은 그 어느 때보다 쉽고 저렴하게 우주에 도달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요.
17세기 철학자 파스칼에게 혹은 그 이전의 인류에게 우주가 “왜소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깨우쳐 주는 대상이었다면 오늘날 우주는 인간의 지성으로 탐사하고 활용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누군가는 더 이상 새로 개발하기도 재생하기도 어려운 지구의 위기를 걱정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발 빠르게 무중력 공간으로 로켓을 쏘아 우주 공장을 짓는 지구인의 이면을 나란히 보고 싶었어요. 혹시 이지선 선생님의 한 편을 읽은 분이 있다면 우주와 자신의 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신지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한편》 정기구독자에게는 매 호의 작업 후기를 담은 특별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지선 선생님의 답변 일부도 함께 전해 봅니다. “‘하늘’과 ‘별’ 외에도 그 기원과 본성을 밝히려는 인간 이성의 부단한 노력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배우고는 철학도가 되었다. 과학적 우주론에서 다루는 실재로서의 우주보다는 그러한 실재에 한없이 다가려는 노력을 추동하는 이념과 이상으로서의 우주에 끌리게 되었고, 그렇게 노력해 온 역사를 추적하기 시작했다.”라는 부분 너무 멋있고 이야기 듣고 싶지 않나요? 저는 천문학자도 우주공학자도 아니지만 매일 밤 시야를 가득 채우는 우주를 더 가까이 대하고 싶어요.
‘한편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민음사HP>나의 멤버십>기록하는 한편 PDF에서 받을 수 있어요!
Q1. ‘집’이라는 주제를 처음 청탁받았을 때 어떠셨어요?
주제도 주제지만 《한편》의 청탁이라는 점에서 큰 영광이었고 그런 점에서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의무나 명령, 심지어 어떤 운명처럼 느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한편》과 같은 인문학의 고급 · 본격 · 융합 대중화 시도에 나름의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왔던 터여서요. 결과는 예상 이상이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새로운 글쓰기 실험을 시도할 수 있었고, 내용상으로는 이전의 생각을 발전시키고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편집진이 처음에 저의 이전 논문을 세심하게 읽고 그에 맞게 원고의 방향을 분명하게 잡아주고, 나중에는 극도의 관용과 인내를 발휘했을 뿐 아니라 갈피를 잡지 못하던 저를 침착하고 지혜롭게 이끌어준 덕분이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전합니다.
Q2. 이번 한 편에 못다 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세요. 사실 이 글 쓰는 데 몇 시간 걸렸다, 편집자가 미웠다, 좋았다……
첫 마감을 지키지 못하고 몇 번을 연장한 끝에 겨우 마쳤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교정 단계에서 두 가지 주문을 받았는데요. 하나는 “우주인이 되고 싶은 지구인을 위한 지상으로의 초대”라는 제목을 간결하게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제목에서조차 만연체를 남발하는 습관이 있는데 거기에 울리는 경종이었달까요. 결국 편집진의 제안한 제목을 따랐는데 결과적으로는 만족합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 얘기가 아닌 저만의 우주론을 개진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래의 단락을 썼는데 너무 사적이고 사소하여 사족에 가까운 듯하여 생략했거든요.

어린 시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좋아서 시를 쓰는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 “하늘”과 “별” 외에도 그 기원과 본성을 밝히려는 인간 이성의 부단한 노력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배우고는 철학도가 되었다. 과학적 우주론에서 다루는 실재로서의 우주보다는 그러한 실재에 한없이 다가려는 노력을 추동하는 이념과 이상으로서의 우주에 끌리게 되었고, 그렇게 노력해 온 역사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 우주론에서 갈릴레오의 근대적 우주론과 칸트-바슐라르의 관념적 또는 이상적 우주론을 거쳐 라투르의 우주주의적 지구론 또는 생태적 우주주의에 도달했다.

첫 편집회의에서는 “머스크가 개발하고 정복하려는 우주는 나의 우주가 아니다”라고 짐짓 단호하게 얘기를 했는데 그러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바로 이상-이념으로서의 우주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담아내지는 못했어요. 아직은 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에는 자신이 없기도 하고 또 그보다는 남이 앞서 해놓은 이야기가 더 궁금하고 알고 싶은가 봅니다.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발견한 러시아 우주주의처럼요.
Q3. 내가 살고 싶은 집의 안팎의 모습은 어떤가요? 예산 무제한으로, 마음대로 집꾸를 할 수 있다면?
작년에 이런 저런 이유로 이사를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서 또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고요. 그 직전까지 살던 집을 좋아했습니다. 주변에 산, 공원, 전통시장, 고궁, 미술관, 영화관 등등이 두루 있었거든요. 밖으로는 그런 환경이 갖추어져 있으면 좋겠어요. 중정과 툇마루가 있는 고택이나 아르데코 양식의 파리 아파트를 보면서 그런 살아있는 역사 안에서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살기 불편하지 않게 수리가 되었다는 조건하에서요. 아니면 아예 동시대의 유명 건축가가 실내 장식과 가구까지 짜맞춰 준 집도 좋겠습니다. 제 요구사항은 단 하나, 아주 크고 높은 책장과 아주 푹신한 안락의자를 갖춘 서재입니다. 그 외에 다른 건 다 알아서 해 달라고 할 용의가 있습니다.
― 이지선, 《한편》 13호
우주에서 다시 지구로. 지난 달 다녀온 장욱진 전에서는 까치와 나무, 달이라는 작가의 대표적인 도상들보다 집 이미지가 눈에 먼저 들어왔어요. ‘집과 아이’(1959)라는 작품의 캡션을 보면 장욱진 선생은 생전에 집을 네 번 직접 설계하고 지었을 정도로 집이라는 공간을 고민했다고 하네요. 단순한 선으로 표현된 집과 아이의 배치가 너무나 절묘하지요?
저는 여느 때처럼 연휴를 집에서 보냈습니다. 온전히 쉬며 읽은 책 한 권을 소개하고 싶어요. 키어런 세티야 교수의 『라이프 이즈 하드』입니다. 비교적 잘 읽히는 철학서였어요. 단순히 철학자들의 논리만 나열했다면 다른 책을 찾아 유랑했을 텐데…… 끝까지 읽게 하는 위로와 삶에 대한 솔직한 시선이 담겨 있더라고요.
책은 삶의 의미보단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희망의 유무보단 무엇을 희망하는지를, 행복하게 사는 것보단 잘 사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인생은 고되며,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잘 사는 것’이 시작된다고 말해요. 연휴 때 집에서 읽기에 너무 무거운 책 아니었냐고요? 설 연휴가 지나고부터 진짜 새해가 시작된다고 믿는(?) 저에게 경종을 울린 소중한 책이었답니다. 연초마다 통과의례처럼 “산다는 게 뭔지” 고민하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츄라이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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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 마침내 《한편》 13호를 다 읽게 되었어요. 읽는 내내 밑줄을 긋고 싶었답니다. 제가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누군가의 삶을 감히 경험해볼 수 있다는 게 값지게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집’에 대한 필진 각자의 정의를 읽어나가면서 저도 제 몸에 대해, 지구와 우주에 대해, 무분별하고 무지한 혐오와 죽음의 장소까지, 평소라면 하지 못할 생각을 해보며 제 세상을 넓혀나갈 수 있었어요. 《한편》 13호를 볼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듭니다. 편차 큰 날씨에 건강 유의하세요, 고맙습니다!
『재난에 맞서는 과학』 릴레이 북토크의 훈훈한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