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오늘날 혁명이 불가능하다구요?

 

 

『삶을 위한 혁명』 표지 공개
《한편》 집’ 호를 무사히 받으셨나요? 집이라는 글자가 녹아내리는 책을 받아 들고 스산함을 느꼈어요. 한편 디자이너가 골라 준 연한 베이지 색깔의 책등을 보면서 안락함을 느끼기도 하구요.
가까운 사람들이 빠르게 읽고 감상을 전해주는데, 그러면서 각자 자기 집과 삶에 관해서 들려주는 중이에요. 재미있는 건 집 이야기를 하면서 ‘사생활’이라는 개념이 어른거리는 순간인데요. ‘아니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거지?’ ‘이 말을 하고 싶은데 맨정신으로는 안 되겠다.’ 등등 내밀한 이야기를 심상하게 꺼내기도 하고, 뭘 말할 수 없는지를 깨닫는 순간에야 사생활의 존재가 의식되는 거죠. 사생활이라는 영역을 지키려고 부단히 애쓴 사상가들이 있는 한편, 남들이 사생활이라고 말하는 걸 기어코 입에 올리는 작가들도 있잖아요. 나를 보호하고 세상에 나설 전초기지로 사생활을 엄호해야 한다는 생각과, 사생활의 문을 열어서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세상에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
저는 이렇게 의견이 갈릴 때 늘 지금 만들고 있는 책에서 답을 찾아보는데…… 지금 마감 중인 이 책 『삶을 위한 혁명』에 답이 있는 것 같아요!(진짜진짜 마감의 순간) 한국에 처음 소개하는 독일의 철학자 에바 폰 레데커의 첫 책인데요. 시골 농장에서 양을 키우며 자랐고, 베를린에서 철학 강의를 하는 저자는 회색빛의 일상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아주 강렬한 대목…… 미리 보실래요?(자연스럽게 표지 첫 공개)
폭발하는 인기의 이지선 디자이너(@withtext_) 북디자인  

가끔 낯선 도시의 골목길을 걸을 때면 길을 잃었다는 확신이 엄습하곤 한다. 무대 공포증으로 강의실 근처를 서성이다가 문득 세상은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여기, 내 주위와 호텔, 중앙역 사이도. 건물 외벽은 무표정하며 회사 간판은 빛바랬다. 모든 출입구에 철제 그물이 있다. 밀폐된 사무실 건물이 방향과 날씨를 감각할 수 없도록 시야를 차단한다.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강의를 시작하는 말을 혼자 중얼거린다. 사방이 원근감 없는 직선, 시멘트 벽,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 연석이다. 보잘것없는 나무 주변의 땅은 벌거벗겨졌다. 누군가가 개똥을 담은 비닐봉투를 두고 갔다. 발에 느껴지는 것은 걸어가는 길의 표면이 아니라 스스로의 피로다.

 

“포석 아래는 해변이다.” 이 자주 쓰이는 슬로건은 1968년 5월에 무정부주의자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에게서 따온 것으로, 혁명과 자유를 향한 한 세대의 희망을 표현했다. 정말 그런가? 나는 내 삶에서 거의 매일 바다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프랑크푸르트로 뻗은 해변을 더는 기대할 수 없다. 독성 폐기물이 가득 찬 석호 가장자리 해변은 도대체 뭐라고 설명될 수 있을까? 영원한 해변 휴양이라는 유토피아는 실제의 재앙에 맞서 지속되기란 힘들다.

 

과도하게 비싼 도심과 도시 외곽의 산업 지역과 상점 구역의 고정된 구조, 경직성은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없고, 어떤 것도 일구어 낼 수 없다. 스프레이로 하는 단순한 칠하기 또한 불법이다. 포석 아래에는 모래가, 그리고 그 아래에는 진흙층이 쌓여 있다. 해변은 없다. 이 모래와 진흙을 개어 퇴비를 넣으면 비옥한 토양이 될 것이다. 포석 아래 땅. 그러나 이 또한 한계가 있는 비전이다. 우선 세상이 사라지기를 바라야 하는 유토피아는 잘못된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 나는 나의 굳어진 절망을 떨쳐 버리도록 위안을 주는 생각에 익숙해졌다. 포석, 금속 대문, 플라스틱 창문을 본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인간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물론 석회 공장, 크레인, 컴퓨터가 동원된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손이 있다. 인간의 손이 있다. 어떤 손은 고무망치로 포석을 두드려 가며 포장도로를 깔고 있었고, 또 다른 손은 트럭 운전대 위, 공장, 회계 부서에 있었다. 문신이 있는 손, 매니큐어를 바른 손, 금반지가 끼워진 손. 마인 항에서 지게차로 컨테이너 판을 운반하는 손, 공급업체에서 일하는 손이다. 인산염 광산에서 일하는 손, 작업복을 세탁하는 손, 접시를 내놓는 손, 손을 잡는 손들. 그 손들이 훨씬 아름답고, 더 적극적으로 재활용되며, 공유될 수 있는 것들을 만들 수 없었다는 사실이 매우 불편하다. 자기 이름 대신에 브랜드명을 회사 간판 위에 새겨야 했다는 사실, 많은 손들이 염소 세정제 또는 석회 먼지 또는 손목 터널 증후군에 시달린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하지만 인간 노동의 산물이면서 그 모든 시간, 노력, 숙고의 저장소로인 녹슨 차고 문과 삭막한 길모퉁이는 또한 나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운다. 손은 오래전부터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으며, 어떤 손은 늙고 주름졌으며, 다른 손들은 지하에 묻혀 있다. 거리의 포석 하나하나는 인간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를 가리킨다. 그것은 전 세계에 걸쳐 있으며 과거로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텅 빈 거리에서 허탈하게 웃는다. 이 세상이 어떻게 잘못 돌아가고 있는지는 상관없다. 우리가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렇게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계속해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손으로, 다르게 만들어 나갈 수도 있다.

― 에바 폰 레데커, 임보라 옮김,
『삶을 위한 혁명』 중에서
지난 금요일인 1월 26일 저녁에는 『이미지란 무엇인가』 첫 번째 북토크를 했어요. 서강대 철학연구소와 민음사가 마련한 자리에 100여 명의 청중이 함께한 엄청난 자리였는데요. 이날 저자 이솔 선생님의 마지막 답변이 글쎄 『삶을 위한 혁명』의 위 구절과 공명하고 있었습니다. “이미지가 현실을 바꿀 수 있나요?” “우리의 현실은 오직 이미지를 통해서만 바뀔 수 있습니다.”
에바 폰 레데커가 돌보고 일하는 일상의 관점에서 오래된 마초적인 혁명론을 갱신한다면, 이솔은 가상을 배격하는 오래된 철학을 물리치고 새로운 이미지 이론을 밝히는데요. 저는 두 여성 철학자의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계속 궁금했는데(의심했는데) 북토크 현장에서 마침내 알게 된 거죠. 그냥 길을 걷다가…… 길거리를 보면서 생각하다가 “그 모든 물질적 자원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법과 규칙들”의 기원에 대해 자기만의 생각을 세운 거구나. 자신감 있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 오래 해온 자기만의 생각이 있다.
‘집’ 호를 만들면서 드디어 완독한 『노마드랜드』에도 그런 자신감의 소유자가 나와요.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가 이 책을 시작하고 끝내게 해준 가장 중요한 인터뷰이인 린다입니다. 노년의 나이에 집 없이 트레일러에서 살고, 물류창고나 캠프장에서 그때그때 저임금 일자리를 구하는 린다의 삶은 어떨까요?
‘홈리스의 비참’을 다룬 사회비판서를 예상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린다의 자신감에 놀랐어요. 자급자족하는 집을 짓겠다는 오래된 꿈이 바로 린다가 뿜는 에너지의 원천인데요. 그에게는 자기가 살고 싶은 집에 대한 확실한 이미지가 있어요. 린다가 꿈꾸는 ‘지구와 친한 집(earthship)’은 쓰레기가 넘쳐 나는 현실을 바꾸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자급자족하는 집에 관해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 정화 편집자에게도 감사를 전하며…… )
“[새로 만나게 된 남자가] 내 계획이 정말로 훌륭하다고 그러더라고요. 난 공상에 빠져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판타지만은 아니라고요. 실행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들 사이가 어떻게 되든, 자신은 사막에 있는 땅을 단독 명의로 유지할 거라고 린다가 덧붙였다. 농지에 집을 짓는 일은 결국, ‘린다의’ 꿈이었으니까.”(392쪽)
삶을 위한 혁명! 색색의 실타래가 엉킨 듯 길을 찾는 듯한 표지는 여러 번 봤지만, 본문을 읽는 건건 처음이에요. “사방이 원근감 없는 직선, 시멘트 벽,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 연석이다. 보잘것없는 나무 주변의 땅은 벌거벗겨졌다. 누군가가 개똥을 담은 비닐봉투를 두고 갔다.” 눈앞의 세계는 너무나 초라하고, 저 역시 일상에서 자주 마주하는 세상의 초라함과 제 자신의 피로를 떠올리게 되어요.
‘이 못난 세상과 못난 나, 대체 어떻게 하면 좋아?’ 혼자 생각할 때, 적어도 “세상이 사라지기를 바라야 하는 유토피아는 잘못된 것이다.”라는 문장은 세차게 공감 갑니다. 사생활을 꺼내 놓느냐, 나의 소중한 집에 담아 두느냐라는 물음에 저는 대개 전자인 편이지만, 어떤 경로로든 나로부터 튀어나온 이야기가 남(또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야기 자체의 힘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겠어요. 제게는 ‘혁명이 가능한가?’ 급으로 무거운 ‘우리는 안전한 사회를, 안전한 집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한 작가가 내놓은 답변처럼요.
“나는 이 책을 쓰면서 가습기살균제 참사라는 사회적 재난을 글로 옮기고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
다. 예측 불가의 상황에서도 늘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의 모습에서 나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용기를 다시 얻었다. 거창한 목표는 없다. 그저 2019년부터 읽은 논문과 보고서, 기사, 참고 문헌들과 현장에서 만난 전문가, 피해자 사이에서 내가 전할 수 있는 고민과 질문이 있다는 걸 알기에 손을 들고 나의 이야기를 말해 보는 것이다. 누군가 왜 굳이 책을 써야 하는지 묻는다면 지금이 바로 이 이야기가 세상에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재난에 맞서는 과학』, 209~210쪽)
‘집’과 『재난에 맞서는 과학』을 함께 이야기하는 공개 세미나가 옵니다!
아, 지난 편지에서 알린 『글 쓰는 여자들의 특별한 친구』와 《한편》 편집자의 콜라보 북토크, 혹시 참여한 분 계실까요? 제가 가장 최근 사생활을 잔뜩 토로한 자리는 바로 그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미국 인류학계의 두 거두 마거릿 미드와 루스 베네딕트의 ‘밀고 끄는’ 교유, 후원자 페기 구겐하임과 그의 넉넉하고 긴 후원 속에 작가 활동을 이어간 주나 반스의 아슬아슬한 관계를 낭독하며 ‘나는 이런 우정 없소……’ 고백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한편 최근 읽은 만화책 중에 저 역시 공감할 수 있는 우정의 한 장면이 있었으니, 바로 실제 친구도 직장 동료도 아니지만 전우애 하나로 뭉친 아마추어 창작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래 소개한 페이지의 곱슬머리 창작자는 단지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아마추어 소책자를 내기로 결심하지만 누가 자기 작품을 읽어 줄까, 이런 마이너한 장르가 팔리기는 할까 움츠러듭니다. 아마추어 선배인 단발머리 창작자는 그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데 더해 마감 전날 실질적인 노동까지 참전하지요. 이것이 우정이라면 저에게도 그 기억이 없지 않고, 앞으로도 누군가와 계속 주고받길 바라게 돼요.
에바 폰 레데커의 글에서 인간의 손에 주목하는 데 크게 공감해요. 세상 모든 것이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의 손으로 직접 하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특히 돌보는 일은 가장 마지막까지 사람이 직접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하기도 하죠.
요즘 저는 넷플릭스에서 일본 드라마 「우리 집 이야기」를 보고 있어요. 가수이자 배우 나가세 토모야가 전직 프로레슬러이자 일본의 전통 공연인 ‘노’를 이어받아야 할 가문의 후계자로 나오는 이 코믹한 드라마의 주제는…… 바로 집에서의 부모 간병입니다. 집이 싫어 뛰쳐 나간 주인공은 무형문화재인 아버지가 노환으로 쓰러지자 집으로 25년 만에 돌아와요.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치매와 뇌출혈 후유증을 겪는 아버지 돌보는 일을 나눠 하게 됩니다.
이 드라마에는 유난히 주인공이 아버지를 목욕시키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일본의 매일 목욕하는 문화도 있겠지만, 아마 일상에서 화장실과 씻는 문제가 가장 혼자 하고 싶으면서도 또한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기 때문이겠지요? 완고하고 권위적인 아버지, 반항심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아들은 평생 서로 제대로 대화한 적 없지만 씻겨 주고 몸을 드러내는 시간이 쌓이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는 면이 잘 표현되어 있어요.
부모 돌봄은 제게 아주 새로운 주제인데요. 사실 선배들이 걱정이나 어려움을 토로할 때 그저 남일처럼 듣곤 했는데, 어느새 눈앞에 성큼 다가온 느낌입니다. 드라마 속 가족은 돈도 많고 돌봄을 나눌 구성원도 많고, 일본의 가정 간호 및 노인 간병 인프라 수준도 매우 높은 것이 느껴지는데요. 한편 한국에서 나는……? 이런 걱정도 많이 드네요.
저도 드라마 추천이에요. 「소공녀」x「윤희에게」 두 감독님이 함께 제작한 티빙 오리지널 6부작 드라마. 이미 이 정보만으로 저는 저항없이 보게 되었습니다. 근데 심지어 소공녀의 두 주연 배우가 이번엔 섹스리스 부부로 케미를 맞춘다니…… 정말 흥미진진 그 자체입니다. ㅎㅎ ‘불륜’을 소재로 한다길래 반신반의 하며 시작했는데 ‘섹스’ 등 사랑에 대한 발칙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6부작이어서 영화같은 퀄리티로 거침없이 전개해나가는 드라마입니다. 제목이 Long time no sex, 「LTNS」 추천드리며 만약 아직 「소공녀」, 「윤희에게」도 안 보신 분들이 있다면 함께 강.추.드립니다!
- 오늘 글들이.저에게는 위안이 됩니다. 아직 초반이라 저에게 이렇게 배달되어 오는것만으로도 감동입니다.
- 한편을 구독하며 유독 이번 ‘집’의 출간이 느린 것 같았어요. 1월 초부터 민음사 홈페이지에 한편을 찾아 여러번 들락날락 했습니다. 작년 1월엔 며칠쯤 나왔는지도 찾아봤어요. 그토록 기대하던 집이 이제 내일이면 도착할 것 같네요. 아쉽게도 전 내일 여행을 떠나 집에 없지만, 다시 돌아올 집이 있기에 여행이 즐거운 것 아니겠어요. 내가 쉴 곳이면서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 곳이기도 한 집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들을 수 있어 기대돼요. 한편이 계속되길 기대하며 응원합니다.
- ‘집’이라는 주제를 보고 저는 당연히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그래서 사실 지난 편지에서 공개된 목차를 보고도 그닥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답니다. 목차의 제목들을 보니 제가 생각한 집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편지에 담긴 한솔 편집자님의 글 일부를 보니 이번 잡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지난 편지로 돌아가 목차를 한번 더 읽어보기도 했어요. 다시 읽어보니 집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거 같아 기대가 됩니다.
미루가 약 바른 데를 자꾸 핥아서 혼자 격리된 막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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