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개와 고양이, 둘 중 어느 쪽?

 

 

우리는 모두 개와 고양이의 특성을 갖고 있다!
지난 주 소개해 드린 앙드레 지드의 『팔뤼드』 에 대한 반응으로 각자 ‘소통이 되고 있는 것인가?’ ‘이건 불통이다!’ 경험을 들려 주신 것이 너무 재밌어요. 망해 버린 대화를 살리는 단 하나의 방법은, 안 될 것 같고 짜증나고 벌써 실망스럽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질문해 보는 건가 봐요. “내 말 이해했어?” 하고 말이죠.
“대화가 되지 않는 두 사람 가운데 끼어 있어요. 저는 둘 다 이해가 안되는데 어쨌든 서로는 해결을 했으면 좋겠네요. 제가 너무 고달프거든요. 의문점이 있으면 추측하지 말고 솔직하게 질문하면 좋을텐데. (…) 당사자는 아니지만 해결책을 하나 얻어 갑니다.”
“망해 버린 대화로 말줄임표가 가득한 이번 편지가 유독 웃겼어요.”
“자주 보지 못하는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들과 연락 할 때에는 종종 ‘저의 일’을 설명해야 할 때가 오고, 저는 그럴 때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곤 합니다. (…) 그런데, “내 말 이해했어?”라고 물어보기에는 확인하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막상 묻지는 못할 때가 많아요. 그런 시점에 상대방이 질문을 해 주면, 나의 이야기를 잘 듣는 중이라는걸 알 수 있어서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들어요.”

“대화의 교본이라는 키워드에 홀려 『나의 덴마크 선생님』 큐레이션 링크를 눌러 보게 됐어요. 요즘 최대 스트레스가 처음 생긴 부사수인데 저 책을 읽으면 어쩌면 스트레스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구매해 봤습니다.”
오늘은 제가 정말 사랑하는 작가의 산문 한 문단을 소개해 드려요. 체코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가, 현대 체코어를 만들어 냈다고 칭송받는 작가 카렐 차페크인데요. 저는 처음 차페크를 읽고 ‘체코 사람들에게는 이런 작가가 있단 말이지!’ 하고 부들부들 떨며 질투심까지 느꼈답니다. 그는 여러 개와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키우며 사랑하고 세심하게 관찰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도 유머와 따뜻함을 잃지 않았던 위대한 작가가 전하는, 인간의 영원한 친구 개와 고양이 이야기를 함께 읽어 봅시다.
세심히 관찰한 결과, 나는 권위자에 버금가는 확신으로 장담할 수 있습니다. 개는 혼자 내버려 두면 놀지 않습니다 . 혼자 내버려 두면 개는 절대적으로, 말하자면 동물적으로 심각해집니다. 할 일이 없으면 주위를 둘러보고 명상을 하고 잠을 자고 벼룩을 잡고 솔이나 슬리퍼나 하여간 무언가를 갉작거리지만 놀지는 않아요.
혼자 있으면 개는 자기 꼬리를 쫓거나 벌판에서 빙빙 돌지도 않고 입에 막대기를 물고 다니지도 않고 앞에 있는 돌멩이를 코로 밀고 다닙니다. 이런 놀이를 하려면 개한테는 파트너나 구경꾼이 필요해요. 누가 함께 놀아 주면 개는 그 반려자를 위해 조증에 걸린 듯 놀아 주는 것이지요. 개의 놀이는 함께한다는 기쁨의 폭발입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사람이든 개든 친절한 영혼을 만날 때만 꼬리를 흔들고, 누가 같이 놀아 주거나 지켜보고 있을 때만 놀기 시작합니다.
자기한테 관심을 거두는 순간 놀이에 지루해지는 예민한 개들도 있습니다. 그런 개들은 오로지 칭찬을 받는 동안에만 놀이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처럼 보이지요. 짧게 말해서 개는 놀이를 하려면 누군가 다른 사람과 자극을 줄 수 있는 접촉이 필요합니다. 애초부터 개의 사교적인 성격에 포함된 부분이에요.
반대로 고양이는 사람이 자극을 주면 놀이를 시작하지만 혼자 있을 때도 놀 수 있습니다. 고양이는 고독하고 개인주의적인 방식으로 스스로 놉니다. 혼자서 가둬 놓고 양털 공이나 술 장식, 달랑거리는 끈만 줘도 우아하고 소리 없는 놀이를 시작하지요. 고양이는 놀 때, 인간, 네가 여기 있어 줘서 정말 기뻐, 뭐,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고양이는 죽은 자의 침상 앞에서도 놀 수 있습니다. 앞발로 수의의 옷자락을 가지고도 잘 놀 것입니다.
개는 절대로 그러지 않습니다. 고양이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재미를 찾습니다. 개는 무슨 영문에서인지 다른 사람을 재미있게 해 주고 싶어 하고요. 고양이는 오로지 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지만 개는 다른 누군가 자기한테 관심을 보이기를 바라지요. 개는 무리의 일원일 때 온전히 활력 넘치는 삶을 사는데, 겨우 두 명이라도 무리는 무리인 겁니다. 꼬리를 쫓으면서도 곁눈으로는 누군가 해 줄지도 모르는 말에 신경을 쓰고요. 고양이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스스로 즐거우면 그만이지요.
아마도 고양이가 개처럼 자기를 잊고 숨이 턱에 닿게 차도록 열정적으로 온 힘을 쏟아 놀이에 투신하지 않는 건 그런 이유 탓일 겁니다. 언제 봐도 고양이는 그러기엔 조금 도도해 보입니다. 항상 우아하게 살짝 깔보는 마음으로 놀이에 임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개는 허심탄회하게 놀이에 매진하지만, 고양이는 잠깐 변덕을 부리듯 놀지요.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고양이들은 유아독존으로 즐거움을 찾는 아이러니 천재들의 후예입니다. 사람이나 물건을 가지고 놀기도 하지만, 그것도 다 살짝 깔보며 자기만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개들은 유머 작가들의 과에서 내려옵니다. 짤막한 일화를 팔아 먹고사는 유머 작가들처럼 성격이 좋고 세속적이며, 자기 이야기를 소비하는 대중이 없다면 권태에 못 이겨 제 몸을 깨물어 갈기갈기 찢고야 말 유형이에요. 개는 순전한 사교성에서 놀이에 참여하며, 오로지 순수한 열의에서 공동의 놀이에 온몸이 터져 나가도록 열심히 임하죠.
개인적으로 체험해 봤다는 사실만으로 고양이는 만족하고도 남습니다. 개는 성공을 거두고 싶어 합니다. 고양이는 주관주의자입니다. 개는 반려자가 존재하는 세계에 살며, 그러기에 객관주의자입니다. 고양이는 동물처럼 신비롭습니다. 개는 인간처럼 나이브하고요. 고양이는 약간 유미주의자입니다. 개는 평범한 인간과 비슷하지요. 아니 창작하는 인간을 닮았다고 해야 할까요. 개는 어떤 내면적 성향으로 인해 타자로, 모든 타자에게로 향합니다.
개는 자기만을 위해 살지 않지요. 자기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배우처럼,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서 시를 쓸 수는 없는 시인처럼, 자기 얼굴을 벽에 걸겠다는 이유만으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화가처럼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영혼을 걸고 참여하는 모든 놀이에도 역시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를 갈구하는, 그 간절하게 못 박힌 시선이 있습니다. 크고 소중한 인간 무리 전체의 관심을 구하는 그 눈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수한 열의는 우리를 산산조각으로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 카렐 차페크, 김선형 옮김,
“함께한다는 기쁨의 폭발”을 누구보다 잘 보여 주는 우리 개들을 합법적으로 소개할 시간이 왔군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골든 리트리버는 사람을 무척 좋아하고 따르죠! 차페크의 관찰이 뛰어난데, 그런데…… 리트리버 두 마리와 사는 입장에서는 이의도 제기하고 싶단 말이죠.
위 사진에서 왼쪽이 막스(저의 프사), 오른쪽이 미루인데요. 막스가 차페크가 묘사하는 대로의 사교적인 개라면, 오른쪽 미루는 그렇지만은 않아요. 사진에서도 보이듯 인간 눈을 마주치고 들여다보고 애교를 쏟아버리는 막스와 달리 미루는 인간과 눈 마주치기를 꺼려요. 그저 가는(막스의 왕발에 비해) 앞발을 내밀고 무한히 쓰다듬을 것을 요구하면서 가르릉거리길 좋아하구요. 말하자면 미루는 고양이 같은 개예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반론을 준비하는 인간에게 차페크는 마지막 문장으로 한대 때리네요. “그 순수한 열의는 우리를 산산조각으로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이르자 정말 개 때문에 산산조각난 가족의 일들이 생각나면서 차페크에게는 그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지네요. 이런 강한 문장에 한편의 동물전문가 편집자님은 뭐라고 평하실지…….
응용편: 아빠에게 눈 마주치는 쪽이 막스  
서로밖에 없어요
아니, 저희 집 고양이를 소개할 수 있는 이런 소중한 기회가…… (헐레벌떡) 차페크의 개와 고양이 이야기 옆에 제가 좋아하는 그르니에의 글을 나란히 놓고 싶어요. 철학자 장 그르니에는 『어느 개의 죽음』의 끝에 실린 글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관하여」에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라며 “차라리 살아가는 방식에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개와 고양이를 통해 그 두 형태를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하자.”라고 해요. 덧붙는 분류가 재미있어요. “개 쪽에는 말과 비둘기가 포함된다. 고양이 쪽에 원숭이와 앵무새가 포함된다.”
레터 코멘트를 다는 화요일 밤
보기 드문 개 모드 라니
평소에는 거리를 두고 지켜봅니다
이 구분법에 따르면 개 쪽에는 친밀감이 있고, 고양이 쪽에는 거리감이 있어요. 가까이 있기와 멀리 있기. 사교적인 막스나 무한한 쓰다듬기가 필요한 미루에 비해 인간과 붙어 있는 시간만큼 자기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 고양이 라니를 생각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르니에는 누군가가 개 쪽과 고양이 쪽 중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며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러 지하 세계로 간 오르페우스를 예로 들고 있는데요. 리트리버 편집자님이 짚어 주신 차페크의 마지막 문장이 생각나는 대목이에요.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지옥으로 되돌아간다.(개의 충실함) 그녀를 데리고 나오면서는 약속을 어기고 결국 뒤돌아본다.(고양이의 호기심)”
우리를 산산조각으로 무너뜨리는 건 개의 충실함이기도 하고 고양이의 호기심이기도 한 것 같네요…… 개 쪽과 고양이 쪽을 구분하는 질문으로는 ‘얼마나 가까워질까?’만이 아니라 ‘어떻게 가까워질까?’도 있는 것 같아요. 모두 어렵고도 어려운 문제라서, 저는 어떻게 개 모드로 전환해서 친근함을 표할지, 언제 고양이 모드로 돌아가서 차분하게 생각해 볼지 고민하며 지내는 것 같아요.
고양이의 호기심 
곁눈질로 지켜보기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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