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온라인 세계가 진짜가 될 때

 

 

이미지의 의미를 찾아서
 ’우정’ 호 선물로 보라색 편지지를 받으신 독자님, 가을 사이 편지를 띄울 상대를 정하셨나요? 저는 일 년을 돌아보며 남은 한 달 동안 꼭 만나야 할 사람, 감사 인사를 보낼 사람의 목록을 정리하고 있어요.
안부 편지 몇 통은 첫 미팅부터 초고를 받고 편집 의견을 나누며 (대체로 술과 함께) 눈물과 행복의 여정을 보낸 ‘탐구’ 시리즈의 저자들께 보내게 될 텐데……. 여러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리는 와중, 이번 연말에는 역시 얼마 전 따끈따끈 실물 책이 출간된 『이미지란 무엇인가』의 저자 이솔 선생님을 뵙고 싶네요. 마감까지 너무 고생이 많으셨다는 눈물의 한잔, 드디어 책이 나왔다는 기쁨의 한잔, 그리고 ‘이미지 철학 탐구’를 더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결의의 한잔…….
왜 이미지인가? 사르트르의 이미지 이론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쓴 2013년 이후 줄곧 뒤를 따라다니던 물음이다. 이미지를 연구 주제로 선택하게 된 데에 거창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실재가 닿을 수 없이 요원했고, 발 딛고 있는 곳에 이미지들이 있었을 뿐이다.
알고 싶은 것은 본질이었다. 그러나 사물을 주의 깊게 들여다볼수록 핵심이 드러나기는커녕 윤곽조차 흐릿해졌다. ‘실제로 그러한 것’과 ‘그렇게 보이는 것’의 차이는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사물뿐일까?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을 떠도는 것은 몰개성적이며 무차별적인 생각들이었다. 머리에서 머리로 옮아가며 일순간 강렬해지고 또 어느 순간 잊혀 사라지곤 하는 무수한 이야기들. 뜬소문에 불과한지 모를 관념들에 사로잡혀 나의 의견인지 아닌지, 나의 욕망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모방할 뿐이었다. 사물들의 윤곽이 흐릿하듯 나와 타자의 구분 역시 모호했다. 어쩌면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 짓는 세포막조차 없기에 관념의 측면에서 개체의 윤곽은 더욱 희미한지도 모르겠다. 정신의 극장을 떠도는 것은 어떤 점에서도 나에게 고유하다고 할 수 없는 관념들, 이를테면 내가 겪은 적 없는 사건에 대한 분노, 단 한 번 만나 본 적도 없는 인물에 관한 연민 같은 것들이었다. 나의 것이 아닌 타인의 경험들이 일순간 내부로 치닫고 들어와 나의 사유가 되고 감정이 되었다.
그러니 비판해야 할 것은 손쉽게 사태를 주관화하는 종래의 관점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이기적 본성에서 추동된 것이며, 그것이 아무리 이타적 외양을 띌지라도 결국 모든 헌신은 자기애에 불과한 것이라 말하는 관점 말이다. 그런데 모든 행동과 선택의 중심으로 가정된 이 내면적 자아는 대체 무엇인가? 실은 모호하기 짝이 없는 내면이라는 관념에 너무 오랫동안 붙들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 이솔, 「왜 이미지인가」,
몇 년 전 원고 읽기 모임에서 처음 뵌 이솔 선생님은 저로서는 오랜만에 만난 프랑스철학 전공자였어요. 선생님의 박사 논문에는 사르트르와 들뢰즈, 두 거장의 이름이 나란히 써 있었습니다. 현대 철학의 주요한 주제를 논한 이들 철학자에게서 특별히 이미지의 문제를 발굴했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다른 한편 참가자의 원고를 하나하나 꼼꼼히 코멘트하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저의 온갖 세속적인 물음에 가능한 최선의 답을 내어 주실 것 같다는 기대감이 한껏 커졌지요…….
책의 편집 후기에서 리트리버 편집자님은 이렇게 말해요. “사르트르와 들뢰즈의 이미지 이론 연구로 서강대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신진연구자상을 수상한 이솔은 사르트르 철학의 고유한 혁명성에 공명하는 연구자다. 철두철미한 논리와 장군 같은 행동력의 소유자로, 특히 여성 철학 필자를 간절히 찾던 나는 그에게 책을 써 달라고 매달렸다.” ‘철두철미한 논리와 장군 같은 행동력’을 일찍이 알아 보신 건데요.
그러한 이미지 연구자가 “알고 싶은 것은 본질이었다.”라고 선언하는 대목에 가슴이 철렁해요. 이미지는…… 그림, 영화 같은 작품이나 SNS 피드와 온라인 커뮤니티에 널리고 널린 가상의 무언가가 아닌가? 내 눈앞을 떠도는 무수한 이미지를 파고드는 일이 왜 나의 자아의 문제가 되며, 세계의 본질에 다가가는 질문이 되는 걸까? 때때로 미술관에 걸린 진품보다 나의 주변을 떠도는 온라인 세상의 가상 이미지로부터 더 큰 영향력을 느낀다면, 선생님의 철학적 탐구에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겠어요.
이미지가 실재의 지위를 찬탈하고 대체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인가? 하이퍼리얼리티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진단은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매체 기술의 발달로 실제적 차원의 감각적인 속성들이 디지털 이미지의 형식으로 재현 가능한
것이 되었고, 그에 따라 감각적 자질들의 생생함을 근거로 가상과 실재를 구분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80년대 신기술의 발전을 목도한 보드리야르와 달리 디지털 세계를 이미 익숙하게 살아가고 있는 지금 떠오르는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실재와 비실재를 혼동하고 있는가? 만일 혼동하고 있다고 해도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상’이라는 낡아 빠진 관념이 도무지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실재’의 정의가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온라인이 다수의 사용자가 함께하는 공동의 공간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온라인 공간을 떠도는 디지털 이미지는 사적인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디지털 이미지는 개인의 주관적 체험의 영역을 벗어나 공적 합의에 근거하는 공동체적 차원의 환상이다. (중략)
온라인 세계의 새로운 이미지들로부터 우리는 ‘실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관한 새로운 답변을 마련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한다. 종종 현대의 매체적 현실은 반사물 또는 비사물들이 점유한 디스토피아로 그려진다. 혹자는 무게와 질량을 가진 사물들이 사라지고 한없이 가벼운 디지털 이미지들만이 가득한 오늘날의 세계가 실재와의 접촉을 잃어버린 폐쇄적 세계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진단은 오로지 실재의 외연을 물질에 제한하는 한에서 유효하다.
디지털 이미지는 실재로서의 세계를 외면하게 하는 불온한 가상이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 이미지는 실재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우리를 인도한다.
— 이솔, 「왜 이미지인가」, 『이미지란 무엇인가』
151~152, 157~158쪽 중에서
“디지털 이미지는 실재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문장에서 ‘이미지 탐구’의 초점은 현재에 있다는 게 분명하게 드러나는데요. 『이미지란 무엇인가』를 편집하면서 가장 풀기 어려웠던 문제가 떠올라요. 바로 철학에서 사례란 무엇인가? 하는 건데요.
유명한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 데카르트의 ‘전능한 악마의 가설’, 사르트르가 드는 ‘베토벤 7번 교향곡이 울려퍼지는 연주회장’…… 이런 사례의 의미가 뭐냐는 거죠. 이 사례들은 우리가 철학책을 읽을 때 그나마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는 이야기인데요. 단지 철학을 뒷받침하는 전제로 환원되지는 않는 것이구요. 그럼 철학은 모두 맞는 이론의 집합인가요?(플라톤도 맞고 데카르트도 맞고 사르트르도 맞다. 철학 최고) 아니면 앞의 철학은 뒤의 철학에 의해서 기각되는 건가요?(뒷사람이 앞사람을 극복하는 진부한 철학사)
『이미지란 무엇인가』가 철학사 강의에서 이미지 철학으로 도약하는 계기는 바로 디지털 이미지라는 사례에서라고 생각해요. 이 책을 주의 깊게 읽자면 플라톤이냐 사르트르냐를 따지는 게 아니라, 오래된 가상 개념이 다시 살아와서 스마트폰 앞에서 작동하는 걸 느끼게 되는데요. 이때가!! 바로 독자도 철학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알약 편집자님이 “내 눈앞을 떠도는 무수한 이미지를 파고드는 일이 왜?”라고 묻는 것처럼, 이 책을 가지고 열린 질문과 대답을 계속 주고받고 싶어요.
웅장한 탐구 8종 이미지!
『이미지란 무엇인가』에 이어 『재난에 맞서는 과학』도 곧 만날 수 있어요.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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