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비둘기와 어울릴 수 있을까

 

 

비둘기가 아니라 악어라면?
대단한 여자들의 친구 이야기를 실은 지난 레터에는 이런 후기가 도착했어요. 
“저 역시 ‘글 쓰는 여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편지를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대학 졸업 후 원하는 분야의 글을 쓰기 위해 원래 살던 지역을 벗어나면서 단지 물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다른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오랜 친구와의 우정을 끝내는 사건이 있기도 했고, 글을 쓰면서 알게 되어 속 깊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던 동료작가와 오해 끝에 절연하기도 하면서 서로의 한계, 그리고 저라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
친밀하고 다정한 관계도 우정이지만 어쩌면 이렇게 처절하고 산산조각 나는 것도 우정의 한 면인 것 같아요. 저와 그 친구가 친하지 않았다면 절교할 이유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냥 아는 사이에는 절교를 하지 않잖아요.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라 친밀했고, 그래서 서로에게 기대하는 부분이 충족되지 않는 어느 시점에서 그 관계의 유통기한이 다가오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생각해 보니 절교해 본 적이 없어요. 언제나 그냥 조용히 어느새 멀어졌던 기억이네요. 이번에 ‘우정’ 호를 준비하면서 편집자들은 각자 친구와의 일들, 구체적인 얼굴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요. 저는 학창시절 친구는 꽤 있었지만 단짝이 없었던 것이 오랜 콤플렉스였어요. 그래서 절교해 본 적도 없고요. 산산조각 나는 것이야말로 우정의 가장 진한 면이겠죠. 원래 하나거나 붙어 있는 것만이 쪼개지기도 할 테니까요……
오늘은 친구라기엔 안 친하고 적으로 삼기에는 미안한 존재와의 얽혀듦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 드릴게요. 철학과 영문학, 신유물론과 에코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연구자 김지은 선생님이 이번 《한편》에 쓴 글이에요. 경기도 수원시의 한 구축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나의 침실 창가에 날아든 비둘기와의 시선 교환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비둘기의 시선이 나만의 안락한 영역을 침범한다고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침입자는 비둘기가 아니다. 비둘기는 자기 서식지에 대한 애착이 매우 두텁고 귀소본능이 강한 영역 동물이다. 비둘기의 평균 수명이 무려 5년에서 20년까지도 이른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고작 2년 전부터 수원시 장안구의 어느 구축 아파트에 세 들어 살고 있는 내 쪽이 입주 후배다.
아파트 복도 난간 곳곳이 비둘기 배설물 때문에 부식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꽤 오래 전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을 것이다. 더욱이 나는 혼자 사는 반면 이곳의 비둘기는 무리 지어 산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오른쪽 다리가 없는 흰 비둘기는 검은 반점이 멋진 다른 흰 비둘기, 그리고 왼쪽 눈 아래가 찢긴 검은 비둘기와 같이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는 쪽 수에서도 밀린다! 
평균 연령층이 꽤 높은 이 아파트 주민들은 구태여 비둘기를 내쫓지 않으며 먹이를 주는 모습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나름대로 인간과 비둘기가 함께 머무는 공존의 장으로 보인다. 단지 내 철장이 쳐져 인간의 출입이 불가능한 삼각형의 작은 공터 안에는 빛바랜 노란색 어린이 시소가 하나 있는데, 시소를 차지하는 건 인간 아이가 아니라 몸집이 작은 어린 비둘기 무리다. 비둘기는 나의 영역, 곧 인간의 영역으로 자신했던 아파트와 도시환경의 경계를 교란시켰다. 나라는 한 인간은 수원이라는 도시에서 비둘기와 어떤 방식으로 얽혀들게 된 것일까? 
사실 비둘기는 법으로 정한 유해야생동물이다.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2조에 따르면 유해야생동물이란 사람의 생명이나 재산에 피해를 주는 야생동물로 환경부령이 정하는 종을 일컫는다. 환경부는 2009년 도심에 거주하는 집비둘기의 개체 수 급증, 악취 및 배설물, 소음 문제를 이유로 집비둘기를 유해야생동물로 지정했다. 
그런데 불과 40년 전만 하더라도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고 번영을 기원하는 동물로 환영받았다.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역대 대통령 취임식(1956~2008년)의 피날레는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비둘기 무리가 만드는 장관이었다. 한때 국가 행사에 동원되기 위해 대량 수입·사육·포획·훈련된 비둘기는 환대와 환호를 받는 유익한 동물이었다.
그 사용가치가 소진되자 이들을 향한 시선은 혐오와 멸시로 바뀌었고 곧 퇴치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비둘기의 강제 동원과 도시 잔류 사연에 지나치게 감정이입할 필요도 없지만, 이 사례는 유익한 동물에서 유해한 동물로의 전락 과정이 지극히 인간 편의와 이익에 따른 것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김지은 연구자가 직접 찍은 동네의 입주 선배 비둘기 무리
수원은 매해 겨울 수천 마리의 떼까마귀가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겨울철 대표 철새인 떼까마귀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서식하다가 겨울에 추위를 피해 잠시 남하하고 봄에 본래 서식지로 돌아가는 습성이 있는데, 2016년부터 수원이 떼까마귀의 겨울철 임시 체류지로 선택되면서 인간과 새 사이 갈등이 불거졌다.
수십에서 수백 마리 떼까마귀가 빼곡히 앉는 바람에 전신주의 전선이 짓눌려 종종 정전이 일어나고, 배설물로 도로 곳곳이 더러워지며, 시민들은 으스스한 분위기에 공포감을 호소한다. 야생동물이 인간의 활동지인 도심 한복판으로 무리 지어 침입한 것이다! 이에 수원시는 전담 모니터링반과 퇴치기동반을 창설하여 유해야생동물 떼까마귀와의 일방적인 전쟁을 선포했다. 기동반은 레이저 퇴치기와 소음 발생기 사용도 서슴지 않는다.
이 환영받지 못한 방문은 신도시 개발로 인한 서식지 감소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2003년부터 추진한 제2기 신도시 건설 계획으로 인해 김포시 녹지 면적이 급감했고, 그 지속적 여파로 떼까마귀는 수원시로 몰리게 되었다. 인간의 안락한 거주 공간을 확장하려는 계획이 떼까마귀의 삼림 서식지를 축소했고, 대체 서식지를 찾지 못한 이들이 도심까지 온 것이다. 떼까마귀의 ‘귀환’이 두드러지는 지역은 비단 수원만이 아니다. 화성·평택·오산을 비롯한 경기 남부는 매년 약 2~4만 마리, 전북 김제는 약 7만 마리, 울산은 약 7~10만 마리의 떼까마귀가 찾는 단골 명소가 되었다. 
흥미로운 건 지자체별 대응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수원시 퇴치기동반은 레이저 퇴치기와 소음 발생기로 떼까마귀를 쫓아냈으며, 제주시는 농작물 피해를 이유로 작년에만 약 250마리의 떼까마귀를 포획해 소각해 버렸고 더 나아가 올해에는 대리포획단 약 스무 명을 공개 모집하며 전면전을 선포했다. 반면 울산시는 태화강을 찾아온 떼까마귀가 생태환경 개선의 신호탄이라고 반기며 이들의 방문을 중장기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올해 말에는 떼까마귀 군무해설장까지 운영하겠다고 공표해, 인간 곁으로 돌아온 새를 환영할 준비를 마친 듯하다. 이 모든 거부와 환대의 기준은 전적으로 인간이 가늠한다.
“이 모든 거부와 환대의 기준은 전적으로 인간이 가늠한다.” 이 문장이 일견 위압적이기도, 선언적이기도 한데요. 지자체별 떼까마귀 반응이 완전히 다르다는 앞의 사례를 거치자 같은 문장이 현실감 있게 다가와요. 그 모든 거부와 환대의 기준을 가늠하는 지역의 인간에 나도 포함이라는 점에서요?!(영등포구 어디로 가는가)
노란고양이 편집자님이 말하는 “친구라기엔 안 친하고 적으로 삼기에는 미안한 존재와의 얽혀듦”이란 삶 자체네요. 같이 살아야만 하는 그런 애매한 사이의 존재들에 대해서 저는 그냥 신경을 끄는 편인데…… 이런 회색지대를 회피하는 마음 때문에 아주 가까운 친구 아니면 진정한 적을 원하는 걸까요? 갑자기 나 포함 모든 낭만주의자들의 극적인 의식을 회의하게 되면서…… ‘감소’를 말하는 철학자 이졸데 카림이 생각나요.
“다원화 사회는 함께하는 하나의 사회를 약속하지 않는다. 감소가 유일한 ‘약속’이다. 즉 사회는 서로 다른 다양한 존재들의 감소를 통한 결합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다원화의 공식이다.”(이졸데 카림, 이승희 옮김, 『나와 타자들』, 290쪽)
며칠 전에 연구자 김지은 선생님께 연락하니 마침 이사를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모처의 구축 아파트라는 장소는 이제 이 글로만 남게 되었다고 하시는데 어쩐지 쓸쓸했습니다. 입주 선배 비둘기 무리와도 이제는 전처럼 자주 ‘뒤얽히지’ 못하겠지요. 새로 이사한 집에도 또 먼저 살고 있는 선배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마침 지금 편집자들은 온 정신을 쏟아 《한편》 다음 호인 ‘집’ 호의 필진을 만나고 있는데요. 이제 거의 마지막 단추가 채워지고 있어요. 다음 전세 재계약은 가능할지, 살림과 돌봄이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 내가 안전과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어디인지, 그리고 우리 지구인의 집은 어디인지……
나는 코로나를 기점으로 인간과 동물·야생·자연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풀어내는 이론적 틀로 에코페미니즘과 신유물론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연을 전용하며 마음껏 소진해 온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에코페미니즘과, 비인간 존재의 행위성과 능동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긍정하는 신유물론이 실마리를 제공하리라 기대했다. 관련 이론가들의 글을 읽으며 어느 정도 기대했던 목표는 달성했다.
그러나 이른 아침 내 침실 밖 창문의 비둘기와 우연히 눈 마주쳤던 것처럼, 그 과정에서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자연은 근대 기계론이 주장한 수동적인 빈 서판이 아닌 역동적이고 풍요로운 공간이되, 그 풍요로움은 인간 존재의 역량과 예측과 범위를 훨씬 초과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딜레마였다.
도시라는 한정된 공간과 경험에서 한발 물러나보면,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더욱 예측 불가능한 역동적 상황에 놓인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북극곰 보호소 방문을 앞둔 유명 개그맨이 “북극곰은 사람을 찢어!”라고 외친 말은 한국 시청자들에게 유쾌한 웃음을 유발했다. 그러나 실제 야생 북극곰을 마주칠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라면 이 발언은 그저 웃음을 위한 표현으로 치부할 수 없게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호주 페미니스트 생태철학자 발 플럼우드가 들려주는 먹이 이야기는 ‘풍요롭고 호의적인 자연’이라는 안일한 환영이 어쩌면 도시인이 덧씌운 ‘낭만화된 자연’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녀는 1985년 2월 호주 카카두 국립공원에서 홀로 카약을 타던 중 바다악어에게 허벅지를 물린 채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죽음의 소용돌이’를 세 번이나 겪는다. 악어의 공격으로부터 기적적으로 생존한 플럼우드는 만물의 주인으로 군림해 온 인간이 먹이로 전락한 사건 속에서 일종의 환영을 발견한다.
악어와의 조우로 드러난 환영은 (……) 꽤나 단순하고 기본인 것들을 완전히, 그리고 체계적으로 잘못 알고 있을 수 있고, 어쩌면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자체를 인지하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드러냈다. 
─ 발 플럼우드, 김지은 옮김, 『악어의 눈: 포식자에서 먹이로의 전락』(yeondoo, 2023), 38~39쪽
플럼우드의 먹이 이야기는 ‘인간을 향한 지구의 대대적 반격!’ 같은 식이 아니다. 다만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품고 있던 얄궂은 희망과 이중적 믿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살아 있는’ 자연의 풍부한 회복력, 성장력과 관계망은 인간, 특히 도시인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은 방식이리라는 섣부른 기대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롯이 자연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기에 인간이라는 한계와 활동 반경 내에서 사유하고 행동한다는 점을 인정하되, 그와 동시에 비인간 존재 및 자연과 맺는 예측 불가능한 얽힌 관계의 패턴을 어떻게 삶 속에서 받아들이고 행동하는가의 문제다. 이러한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에서 도시라는 환경은 결코 부차적 고려 요소가 아니다.

 

《한편》 12호 ‘우정’ 94~103쪽 중에서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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