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바둑 명인의 은퇴 경기

 

 

6개월간의 대국
 지난 주 레터 「혜진이라고 불러 보기」에 대한 독자 피드백 중에는 평어가 흥미롭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 여럿 보였어요. 이번 레터만으로 평어의 사용과 어른의 우정에 대해 알기 조금 어려웠어요. 뭐랄까. 실체가 없는 무언가를 더듬어보고 있는 기분이랄까요. 하지만 서로 존대하는 사이가 아니라 평어를 쓰는 사이, 서두에 나왔던 것처럼 아주 어릴 때 동네 놀이터에서 만나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던 관계에 대해 다시 떠올려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더듬더듬 알아 가는 기분…… 어른들의 우정에 대해 12호 ‘우정’과 함께 더 알아가 봐요. 
오늘은 고요한 소설 한 편을 가져와 봤어요. 언제나처럼 많은 메일과 종이책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와중,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인』을 펼치자마자 순식간에 고즈넉한 바둑의 세계로 빠져들었어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도, 스스로도 지지 않을 거라 믿고 있는 ‘불패의 명인’의 은퇴 경기에는 조용한 긴장감이 흘러요. 
이틀째를 맞이한 대국실은 메이지 시대의 예스러움이 묻어나는 2층으로, 맹장지 문부터 채광창까지 단풍으로 채웠고, 귀퉁이에 둘러친 금병풍에도 고린* 풍의 화려한 단풍이 그려져 있었다. 도코노마**에는 팔손이나무와 달리아를 꽃꽂이해 놓았다. 널찍한 방에다 그 옆방까지 시원스레 터놓은 터라, 커다란 꽃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달리아 꽃은 조금 시들었다. 올림머리를 한 소녀가 꽃 비녀를 꽂고 이따금 차 심부름을 올 뿐, 사람들은 드나들지 않는다. 명인의 하얀 부채가 얼음물을 얹은 검은색 칠(漆) 쟁반에 비치어 움직이는 고즈넉함. 관전은 나 혼자다.
오타케 7단은 반들거리는 검정 비단 기모노에 얇은 겉옷을 걸친 예복 차림인데, 오늘의 명인은 다소 편안하게 가문(家紋)이 수놓인 겉옷을 입었다. 바둑판은 어제 것과 다르다.
어제는 흑백 한 수씩만 두고 나서 바로 축하연이 벌어진 탓에, 진정한 승부는 오늘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오타케 7단이 쥘부채를 소리 나게 흔드는가 하면 두 손을 허리 뒤로 맞잡았다가 다시 부채를 무릎에 세워 그 위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턱을 괴는 모양새를 취해 가며 흑 3의 수를 고심하는 사이, 보라! 명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어깨가 들썩거리는 가쁜 숨결이다. 그러나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규칙 바른 물결이었다. 격렬한 무엇이 차오르는 것일까, 내게는 그리 보였다. 무엇인가 명인 안으로 신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명인 자신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듯, 그래서 나는 더욱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순식간이었고 명인의 호흡은 절로 차분해졌다. 어느새 원래의 숨결대로 편안하다. 나는 이것이 싸움에 임하는 명인의 정신적 도약판인가, 싶었다. 명인이 무의식적으로 영감을 맞이하는 마음 성향일까. 아니면 불타오르는 기백과 투지를 가다듬고 무아(無我) 삼매경으로 맑게 넘어가는 입구일까. ‘불패의 명인’이라 불리는 까닭은 이런 데에도 있었던가.
오타케 7단은 바둑판 앞에 앉기 전, 명인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선생님, 저는 볼일이 잦아서 대국 중에 자주 자리를 뜹니다.”라고 말했다.
“나도 그래. 한밤중에 세 번이나 잠을 깨.” 하고 명인은 중얼거렸는데, 7단의 예민한 체질이 명인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 것 같아 묘한 느낌이었다.
나 역시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하다 보면 자주 볼일을 보게 되고 연신 차를 마시거나 신경성 설사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오타케 7단은 바로 극단적인 경우였다. 일본기원의 봄가을 승단 대회에서도 오직 오타케 7단만이 큼직한 찻주전자를 곁에 두고 꿀꺽꿀꺽 엽차를 마신다. 그 무렵 오타케 7단의 호적수였던 우칭위안 6단도 바둑판 앞에 앉으면 역시나 볼일이 잦았다. 네다섯 시간의 대국 도중에 열 번 이상 자리를 뜨는 걸 나는 직접 세어 본 적이 있다. 우 6단은 그다지 차를 마시는 편도 아니건만, 일어설 때마다 소리가 났으니 신기하다. 오타케 7단은 볼일뿐만이 아니다. 하카마는 말할 것도 없고 허리띠까지 복도에 풀어 놓고 가는 것이니 유별나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유숙자 옮김,
『명인』, 37~39쪽에서
* 오가타 고린(尾形光琳, 1658~1716). 에도 중기의 화가. 대담하고 화려한 화풍을 펼쳤다.
** 다다미방의 정면에 바닥을 한 층 높여 만든 곳. 벽에는 족자를 걸고, 도자기나 꽃병으로 장식한다.
『명인』은 실제 혼인보 슈사이 명인의 마지막 승부를 소재로 한 소설이에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938년 6월부터 12월까지 약 반년 동안 치러진 경기를 참관하고 총 64회의 관전기를 신문에 연재했다고 해요. 천천히 읽어 나가니 대국실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지네요. 은퇴를 앞둔 명인과 그에 도전하는 오타케 7단의 서로 다른 태도도 흥미로워요.
두 사람의 몸이 서로 다르게 움직이는 모양이 재밌어요.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오타케 7단과 호흡이 거칠어졌다 차분해지는 명인…… 오타케 7단의 이런 행동은 자신을 안정시키는 한편 상대의 주의를 흐트러뜨리기 위한 방법이기도 할 텐데, 명인에게는 전혀 안 통하죠. 자신의 몸이 승부의 수, 정신의 도약판이 되어 가는 그야말로 ‘선수’의 모습이네요. 굉장히 꼼꼼한 기록이라 생각되는데,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이 글을 콕 집어 소설이라고 말했던 것이 흥미로워요.
『명인』은 소설이라기엔 기록 요소가 많고, 기록이라기엔 소설 요소가 많다. 기사의 심리에 대해서는 모두 나의 추측이다. 이를 당사자에게 물어본 것은 하나도 없다. 날씨 묘사 하나를 들더라도, 역시 나의 소설이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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