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혜진이라고 불러 보기

 

 

예의 있는 반말
여러분은 혹시 학교나 직장에서 존댓말이 아닌 언어를 써 본 적이 있나요? 새벽녘 절정에 하는 동아리 MT ‘야자 타임’이나 직함 대신 영어 호칭을 도입해 종종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는 스타트업 업계의 풍문이 떠오를지 모르겠어요.
《릿터》 평어 특집호(34호, 39호)나 《한겨레》 기사를 통해 아는 분도 계시겠지만, 민음사 편집부의 일부는 일 년 넘게 평어라는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름 호칭(‘성민 님’, ‘성민 씨’가 아닌 ‘성민’)과 반말로 구성된 이 언어는 저자 이성민이 어린 시절 또래 친구와 나눈 자연스러운 대화에 착안해 개발했다고 해요.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놀이터를 뛰놀던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반말과 존댓말의 차이를 익히지요.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서로 나이를 공유하고, 그에 걸맞는 호칭을 정리한 뒤, 마땅한 예절을 갖추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우리는 언어를 바꿈으로써 다른 관계를 개발할 수 있을까요? 올가을 출간될 《한편》 12호 ‘우정’을 준비하며 ‘예의 있는 반말’을 쓰는 수평적 관계의 사람들이 서로 얻어갈 것은 무엇일지 참고하게 됩니다.
평어 사용이 우리에게 가져올 문화는 평등한 사람들의 문화인 ‘또래 문화’이다. 또래 문화는 바로 그 평등 덕분에 자유가 찾아오는 문화이다. 세계에서 가장 질 좋은 자유의 산지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에 대해서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인들은 또래들 속에서가 아니라면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1]
하지만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에게 ‘또래 집단’이나 ‘또래 문화’는 고대 그리스가 자유를 듬뿍 마시면서 이룩한 빛나는 문화적 성취 같은 것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또래 집단의 언어인 반말처럼, 거친 것들을 연상시킨다. 가령,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나 「써니」에서 볼 수 있는, 거친 말을 내뱉는 학창 시절 동년배 문화. 평어의 도입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또래 경험이 이처럼 거칠었던 사람이 없지 않다. 그리고 내게도 중고등학교 경험은, 우정이 없지는 않았지만, 난폭하고 어두운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오래전부터 평어를 소망하게 만든 것 역시 또래 경험이다. 사실 그것은 좀 더 오래된 교실 밖 또래 경험이다. 운동장이나 골목이나 친구 집이나 놀이터에서 다양한 연령층의 또래들이 모여 다양한 놀이를 했던 기억은 진지하면서도 무척 신났던 기억이다. 오늘날 출생률이 줄듯 빠르게 줄고 있는 이 자발적 또래 놀이 모임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모임에는 나와 나이가 같은 친구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놀이에 더 능숙한 형이나 누나도 있었고, 물론 미숙한 동생도 함께했다. 그렇기에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자연스러웠고, 점점 더 정교해지는 놀이 수행이 있었다. 또한 나이와 상관없이 친근하고 평등한 반말을 사용했으며, 나이가 들수록 놀이 스킬이 발달하듯 말 스킬도 발달했다.
두 종류의 또래 집단이 있다.
  • 동년배로 이루어지며 교사가 주도하는 수직적 수업이 주된 학습 모형이었던 교실 또래 집단. 이 집단은 동년배가 아닌 관계에서 급격하게 수직화되는 경향이 있다.
  • 나이도 경험도 다양하며 서로에게 배우는 또래 집단.
A는 학습이 일방적이고 (시험은 있지만) 수행은 없다. B는 학습이 상호적이면서 즐거운 수행이 있다.[2]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는 어른들이 배제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 후자의 또래 집단을 “아이들의 공화국”[3]이라고 불렀다. 경영학자 피터 센게는 놀이가 아니라 일을 하는 성인들의 조직도 아이들의 조직 못지않게 즐거운 배움과 수행의 경험을 준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학습하는 조직’이라고 불렀다. 센게는 그것을 경험한 이들 중 다수가 그러한 경험을 다시 할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다고 했다고 말하였다.”[4] 이 집단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건, 나는 그들이 하는 놀이나 프로젝트를 모두 ‘모험’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모험을 경험한 사람은 꼭 그것을 다시 찾는다.
— 이성민, 『말 놓을 용기』, 133~136쪽에서
[1] 한나 아렌트 저, 홍원표 역, 『혁명론』(한길사, 2004), 99쪽. (원문은 “그리스인들은 동료들과 함께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2] 나는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하고 있다. 나는 일반적으로 지금의 교사들이 예전의 교사들이 아니며 오늘날의 교실에 수행이 있다는 것을 안다. 같은 나이 기반이라는 사실이 아직 바뀌지 않았지만, 그리고 학교를 바라보는 매체들의 시선이 여전히 예스럽지만, 나는 학교가 예전에 비해 좋아졌다고 보는 편이다. 어떤 것이 변해 보이지 않는 것은 종종 보는 눈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줄리엣 미첼, 이성민 역, 『동기간: 성과 폭력』(도서출판b, 2015), 19쪽.
[4] 피터 센게, 강혜정 역, 『학습하는 조직』(에이지21, 2014), 25쪽.
말줄임표 편집자님을 통해 평어란 것을 처음 알게 된 때가 떠올라요. 학부 시절 자주 어울린 선배들을 몇 년이 지나서야 언니, 오빠 부르며 한층 편하게 대하게 된 기억이 있는데, 직장에서 만난 사람과 그런 질적 변화를 경험하면 어떨지가 너무 궁금했었죠. 짐작하시다시피 호기로운 도전이 늘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지만 저에게 평어는 “나이도 경험도 다양하며 서로에게 배우는 또래 문화”를 알려 주었습니다.
평어 사용은 “혜진이가 엄청 혼났던 그날 / 지원이가 여친이랑 헤어진 그날” 같은 가사 속 반말과 또 다른데요. 이성민 작가와 디자인 학교에서 평어를 사용해 본 윤여경 디자이너는 성민의 말을 빌려 평어를 매개로 한 이 새로운 관계를 ‘어른들의 우정’이라고 전해요. “평어 덕분에 디학은 단순한 공부 모임을 넘어 새로운 우정 공동체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요.
하지만 회사의 모두가 영어 호칭을 쓴다고 문화가 바뀌지 않듯이(“하지만 다들 대표나 이사와 이야기할 때는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혹은 “앤드류께서 말씀하신…” 이러고 앉아 있었다.(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공동체의 의사결정 구조가 평등을 담보하지 않는 한 평어가 금세 반말 문화로 퇴행하고 말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평생 반말을 쓴 친구 사이에서도 어떤 사건을 계기로 더 가까워지거나 단숨에 틀어지는 것을 보면, 평어 쓰기는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새로운 관계의 시작일지도요.
2년 전 《릿터》 31호에 실린 이성민 작가의 글에서 처음 평어를 접했어요. 2022년 2월 《릿터》 34호, 2022년 12월 39호 커버스토리에서 평어를 다루기도 했지요. 그러면서 지난 해 여기저기에 평어 이야기를 하고 다녔는데요.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꽤 많은 사람들과 평어 쓰는 관계가 되어 있음에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올여름 이렇게 마침내 출간된 평어 책을 보니, 그리고 2년 동안 읽어 왔던 글들이 책 속에 녹아 있는 것을 보니 신기하고 기쁘고 옆자리의 동료가 자랑스러워요!
지난봄에 ‘평어’와 ‘플랫폼’을 함께 생각하면서는 언어를 디자인으로 보는 관점을 ‘플랫폼’에 적용해 보기도 했어요. 만남의 장소 플랫폼이 어떻게 설계되어 있는지가 우리들의 의사소통에 영향을 미치니까요. 이 디자인의 영향력은 얼마나 크고 어떻게 작용할까 오래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우정’을 만드는 지금 『말 놓을 용기』를 알약 편집자님 코멘트와 함께 읽으니 역시 우정과 함께 평어를 생각하게 되네요.
요새 저의 고민은 ‘안전하면서 재미있는 관계가 가능할까?’ 하는 건데요. 얼핏 당연히 가능할 것 같지만, 관계란 늘 움직이는 것이라 안전한 관계는 편안해도 재미없어지기 쉽고, 서로를 쿡쿡 자극하는 재미있는 관계는 쉽게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재미없어지기도 불안하기도 싫은 저는…… 오늘도 어른들의 우정, 우정의 공동체, 현대인의 모험에 대해서 고민해 봅니다.
아아, “일을 하는 성인들의 조직도 아이들의 조직 못지않게 즐거운 배움과 수행의 경험을 준다는 것을 강조”한 사람이 경영학자라는 데 양가적인 감정이 들고 말잖아요. 일하는 현장에서 ‘즐거운 배움과 수행의 경험’을 볼 때는 과로와 비합리를 못 보게 되니까요. 즐거워하는 사람을 보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과로하는 사람을 보면서 그는 수행하고 있다고 말하는…… 중용 없는 상태에서 제가 한 발짝 벗어나는 데에도 평어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말 놓을 용기』의 제사에 나오는 통찰인데요. 평어를 쓰면 “모험에서 마주한 적을 항상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돼요. 현대인에게 적을 죽인다는 건 상대를 사람 취급 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면, 평어는 상대를 나의 동반자로 여기면서 시작되는데요. 경험상 평어 속에서 동반자를 죽이지 않으려면…… 내가 죽어야만 돼요. 내가 죽는다는 건 나의 통제 욕구를 죽인다는 뜻이고, 이것이 평등으로 가는 가시밭길이라면, 그러면 그때 안전은 어떻게 담보할지…… (바톤을 넘긴다)
다시 돌아온 바톤……. 적을 죽이지 않으려면 “내가 죽어야” 한다는 리트리버 편집자님의 코멘트에 철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돼요. 또 저와 평어를 쓰는 두 분이 이번 레터에 유독 말줄임표가 많아진 것이 눈길 가는데…… 나와 동등한 타인과 우정을 나누는 즐거움이란 필연적으로 그만큼의 무게를 요한다는 것이 요즘 저의 생각이랍니다. 어딘가로 바톤을 한 번 더 넘길 수 있다면 너와 나 어느 한쪽을 죽이지 않는 방도(“‘너’를 되찾을 수 있다면 그다음으로 ‘나’도 되찾을 수 있다”)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네요.
모두가 존댓말을 사용하는 실천의 한 가지 필연적 함축은 사회적 삶에서의 ‘너’의 소멸이다.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면서 혹시 나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면, 그게 혹시 너가 사라져서가 아닐까 하는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잡아 볼 수도 있을 것이다.[1]
평어 사용 속에 들어 있는 나의 개인적인 소망 중 하나는 바로 이 ‘너’를 그리고, 너를 되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글쓰기 수업을 맡고 있는 디학에서 실제로 학생들과 평어를 쓰고 있다. 또한 평어를 통해 인연을 맺은 민음사 편집자들과도 평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렇듯 평어를 실제로 사용하게 되면서 발견한 가장 놀랍고도 궁금한 현상이 있다. 그것은 평어의 사용으로 ‘너’를 곧바로 되찾을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평어 사용으로 곧바로 ‘너’를 되찾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내게는 평어의 경이로움이다.
— 이성민, 『말 놓을 용기』, 171~172쪽에서
[1] 나는 이 문장에서 평소에 ‘내가’라고 해야 할 것을 ‘나가’라고 해 보았다. 그런데 ‘나가’와 ‘너가’가 모두 들어 있는 이 문장에서 ‘너가’보다는 ‘나가’가 더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이것을 의미할 수 있다. ‘너’를 되찾을 수 있다면 그다음으로 ‘나’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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