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세상에 없는 엄마가 내게 남긴 것

 

 

내 인생의 이야기는 내 어머니 인생의 이야기
이번 월요일에 연차를 써서, 주말부터 꽤 긴 연휴를 보내고 있어요. 쉼의 시간은 이제 뒤로 하고, 다시 일하기 위해 슬슬 기지개를 펴야 할 시간이네요. 다들 어떻게 지내셨어요?
지난 주 1970년대 미국과 중국 간 데탕트, 즉 긴장 완화를 이룬 주역으로 평가 받는 중국의 정치인 저우언라이 평전을 소개한 레터에는 이런 의견을 남겨 주셨는데요. 
“저는 마오(쩌둥)보다는 저우(언라이)와 비슷한 것 같아요.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려하고 갈등은 회피하는 성향입니다. 하지만 마오 같이 권위에 대항하고 투쟁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 같아요. 그런 사람은 어디서나 당당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고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 성격이 별로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와중, 생각해 보니 저우 또한 미중 데탕트를 이룬 외교가로 큰 일을 이루었잖아요. 마오같은 사람도 필요하지만…… 나같은 사람도 어디선가 필요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 역시 갈등 회피형 인간으로서 정말 공감해요. 역사 속에서 나 같은 사람을 찾는 것은 역사적 인물을 다룬 평전을 읽을 때의 큰 즐거움 중 하나 아닐까요.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고 저마다 자신의 능력과 특성으로 무언가를 해내거나, 혹은 예기치 못한 사건을 초래할 때…… 나에겐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오늘 소개할 책 『내 어머니의 자서전』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사람의 평전은 아니에요. 20세기 초 식민지 도미니카를 배경으로, 수백여 년 동안 식민 지배의 복잡한 역사를 가진 이 지역에서 유색인종으로 태어나 특별한 지위 없이 살았던 여성의 생을 기록하고 복원한 ‘소설’입니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했던 이의 목소리를 직접 소환하는 이 독특한 ‘역사’의 도입부를 함께 볼까요?
내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순간 죽었고, 그래서 평생 동안 나와 영원 사이에 서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 등 뒤는 언제나 황량한 검은 바람이었다. 인생의 첫 무렵에는 그러리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내가 그것을 알게 된 떄는 인생의 중반, 내가 더는 젊지 않으며 넘치게 갖고 있던 어떤 것들은 줄어들고 거의 갖고 있지 않던 것들이 늘어났음을 깨달았을 때였다. 그리고 상실과 획득에 대한 이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스스로의 앞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의 시초에는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이 여인이 있었으나, 나의 끝는 세상의 검은 방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나는 평생 동안 내가 낭떠러지에 서 있었다고, 상실 때문에 내가 상처받기 쉽고, 힘들고, 의지할 곳 없다고 느끼게 되었으며, 그 사실을 알고 슬픔과 부끄러움과 스스로에 대한 연민에 휩싸였다.
내 어머니가 온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을 수 있는 연약한 어린아이인 나를 남겨 두고 사망하자, 아버지는 수고비를 주고 세탁을 맡기는 여인에게 나를 데려가서 돌봐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두 보따리의 차이점을 강조했을 수도 있다. 하나는 제 자식, 세상에 하나뿐인 자식은 아니지만 유일하게 결혼한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식이고, 다른 하나는 더러워진 자기 옷가지라고. 그는 보따리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더 곱게 다뤘을 테고, 다른 하나보다 더 신경 써서 관리해 달라고 지시했을 테고, 다른 하나보다 더 소중히 다뤄 주길 바랐을 테지만, 둘 중 무엇이 그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아버지는 몹시 허영심이 강한 사내였고 겉모습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짐이었다는 점을 안다. 더러워진 옷가지가 그에게 짐이었다는 점을 안다. 그가 혼자서 나를 보살피거나, 스스로 자기 옷을 세탁하는 법을 몰랐다는 점도 안다. 
— 저메이카 킨케이드, 김희진 옮김, 『내 어머니의 자서전』,
7~8쪽에서
제목은 『내 어머니의 자서전』인데 첫 문장부터 어머니가 죽었다고 나오니, ‘이걸 자서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그렇지만 한편 이 상실된 어머니는 한번도 주인공 곁을 떠난 적 없이, 내면 깊숙이 존재해 온 것 같아요. 또 주인공은 여러 번 임신하지만 결코 출산하지 않는데요. 내가 태어나자마자 죽은 어머니와 내게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 잃어버리고 없는 이들의 모든 목소리는 그에게 쌓이고 쌓입니다. 이 ‘어머니 없음’과 ‘어머니 아님’으로부터 ‘어머니 됨’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이야기가 완성됩니다.
언젠가부터 가장 강력한 노벨문학상 후보 중 하나로 매년 언급되는 작가 저메이카 킨케이드는 엄마와 딸의 관계라는 주제에 천착해 왔습니다. 그의 ‘엄마와 딸’ 대표 3부작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책에는 또한 카리브 지역의 역사 그 자체인 복잡한 인종 정체성의 문제, 식민 지배 계급의 억압과 모순, 가부장제의 착취 아래 왜곡된 여성들의 투쟁이 얽히고 설켜 있습니다.
사실 낯선 곳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지만 곧 익숙함을 느끼며 빠져들었어요. 글쎄요, 엄마 이야기가 언제나 그렇듯이 좀 힘들지만, 이것보다 더 유구한 ‘역사’가 있을까 싶어요.
내 인생에 대한 이 이야기는 내 인생의 이야기인 만큼 내 어머니 인생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가지지 않은 아이들 인생의 이야기이기도 하니, 그 까닭은 나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내가 한 번도 듣지 못한 목소리,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 내 뿌리인 존재가 있다. 내 안에는 내게서 나왔어야 할 목소리들, 내가 형태를 이루도록 허용하지 않은 얼굴들, 나를 보도록 허락하지 않은 눈들이 있다. 이 이야기는 결코 존재하도록 허락받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이자, 내가 자신이 되도록 허락하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다. 
나날은 길고, 나날은 짧다. 밤들은 공백이다. 밤들은 뭔가에 귀를 기울이지만, 나는 그것과 친숙해지기를 거부한다. 날이라 불리는 기간에 대해 나는 무관심을 선언한다. 그것은 허영이지만 오직 나에게만 알려진 허영이다. 나는 개인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개인적인 것이 되도록 했다. 나는 중요하지 않으므로 중요해지기를 갈망하지 않지만, 어쨋거나 나는 중요하다. 나는 나보다 위대한 것, 내가 복종할 수 있는 그것을 만나길 갈망한다. 그것은 역사책 속에 있지 않고, 내 입술에서 나올 수 있는 이름을 지닌 누구의 작품도 아니다. 죽음은 유일한 실제이니, 그것만이 유일한 확실성이며 만물에게 불가피한 운명이다.
— 저메이카 킨케이드, 김희진 옮김, 『내 어머니의 자서전』,
236~237쪽에서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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