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에로티즘』을 읽자

 

 

인간을 두렵게 하는 것
비 오는 날 지난 레터 <별안간 떠나고 싶을 때>에 보내 주신 독자님들의 코멘트가 기분 좋아요. “우리는 상황과 장소에 따라 우리를 쪼개가면서 살아가고 있죠. 그래서 아무것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낯선 곳으로 가서 ‘가장 순수한 나’ 를 만나고 싶은 충동이 드나 봐요.” 아아, 쪼개가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표현이 와닿는데요. 여름 휴가만 기다리고 있는 이 심경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한편 여행에서 돌아온 독자님도 있어요. “여행에서 돌아와 이 편지를 읽었어요. 딱 편지가 도착한 날 저는 광주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면 자기소개서를 제출해야 하지만 도피하고 싶었나봐요. 1박2일동안 여러 전시관을 드나들며 몰아치는 작품들을 구경하기 바빴네요. 여행도 다녀왔고 편지도 읽었으니 저도 이제 써야할 글을 향해 나아가야겠어요!” 이런 다짐이라니! 전폭적으로 응원합니다.
저는 지난 레터의 토마스 만에서 이 구절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사실 그의 욕구는 타치오가 있는 데서 창작하고 글을 쓰며, 그 소년의 육체를 자기 문체의 본보기로 삼아 그 신적인 형상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었다.” 육체를 문체의 본보기로 삼는다는 게 어떻게 가능하죠? 그래서 에로스에 대한 책을 펼쳤습니다. 샤이니 태민에게 황상훈 안무가가 추천해서 화제가 된 바로 그 책이에요. 
결정적인 행위는 발가벗기이다. 나체는 폐쇄적 상태, 다시 말해서 존재의 불연속적 상태와는 대립적이다. 그것은 자신에의 웅크림 너머로, 존재의 가능한 연속성을 찾아나서는 교통(交通)의 상태이다. 우리에게 음란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이 비밀스러운 행위에 의해서 육체는 연속성을 향해 열린다. 음란은 동요를 의미한다. 그것은 확고하고 견고하던 개체, 자제(自制)되던 육체를 뒤흔들어 어지럽힌다. 자제는커녕 성기들은 서로 뒤엉켜 부서지는 파도처럼 거듭 새로워지는 융합의 물결에 젖어들며, 이어 자아에 대한 소유권 상실이 이루어진다. 소유권 상실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루어지는지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것을 예고하는, 또는 그것의 표지라고 할 수 있는 나체 상태가 되면 자기 몸을 감추는데, 탈취를 완성시키는 에로티즘 행위가 나체 상태 뒤에 올 때는 더욱 그렇다. 나체가 충분한 의미를 갖는 문화에서의 발가벗기는 유사 죽음 아니면 적어도 가벼운 죽음과 맞먹었다. 고대에는 탈취(파괴)가 에로티즘의 근거를 마련하곤 했다. 이는 애정 행위와 제의(祭儀)가 서로 멀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현실적인 존재와 저 너머 세계의 결합을 예고하는 신성의 에로티즘에 대해서는 좀 더 뒤에서 다룰 기회가 있으므로, 그때 자세히 언급하겠다. 그렇더라도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서 당장 밝혀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 하나 있다. 에로티즘 행위의 여성은 희생자, 남성은 제물 헌납자로 보이며, 둘은 일을 치르는 과정에서 최초의 파괴 행위에 의해 성립된 연속성에 몸을 맡긴 채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문제의 파괴 행위가 엄청나지 않으면 위 비교의 의미는 부분적으로 희석된다. 에로티즘 행위는 에로티즘을 구성하는 모독의 요소, 더 나아가 폭력적 요소가 없다면 충만함에 이르기가 그만큼 어렵다. 그렇다고 진짜 파괴, 다시 말해 죽음 자체가 내가 위에서 말한 어떤 유사 형태의 그것보다 더 완벽한 형태의 에로티즘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말은 아니다. 사드 후작은 그의 소설에서 에로티즘의 흥분의 절정은 살해 행위에 있다고 말했는데 그 말은 다른 뜻을 가진 말이 아니다. 내가 이미 충동에 대해서 어느 정도 설명했듯이 충동을 극단까지 몰아가면 그것은 죽음과 그리 멀지 않다는 말이다. 정상적 삶으로부터 욕망으로의 이행 과정에는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유혹이 있다. 에로티즘에서 언제나 문제 되는 것은 안정된 형태의 와해, 다시 말해 현재의 우리, 뚜렷한 개인들의 불연속적 질서 그리고 그것을 떠받쳐 주는 일정한 사회적 삶의 형태들의 와해이다. 그러나 사드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존재 소멸의 위험은 번식에서와는 달리 에로티즘에서는 결정적이지 않다. 불연속적 개체는 위기를 겪을 뿐이다. 불연속적 개체는 극도의 혼란, 혼미를 겪을
것이다. 거기에는 불연속적 존재들의 죽음만이 확실하게 가져다주는, 연속성이 지배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의 연속성의 추구가 있다. 불연속성 위에 세워진 세계 안에서는 불연속성의 세계를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연속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드의 탈선은 그러한 범위를 넘어선다. 어떠어떠한 사람들은 사드의 탈선에 매력을 느끼며, 소수이지만 그들 중에는 극단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드의 탈선적인 행위들은 정상적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물론 오직 기본적 방식의 극단적 방향을 제시해 주는 데 그친다. 우리를 자극하는 끔찍한 극단적 충동이 있다. 충동의 의미를 밝혀 주는 것은 바로 그 극단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에게 무서운 징후로 작용할 뿐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것은 극단적 파열, 즉 고뇌에 붙잡힌 불연속적 개체의 죽음이 삶보다 더 큰 진리를 담고 있음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 조르주 바타유, 조한경 옮김,
『에로티즘』, 19~21쪽에서
태민을 생각하면서 읽어서인지, 주제 자체의 마성 때문인지 두꺼운 ‘현대사상의 모험’이 잘 읽히는 거 있죠. 자극적인 묘사를 찾다가 놀라게 된 건, 에로티즘과 폭력의 연관성을 말하는 대목에서였어요. “충동을 극단까지 몰아가면 그것은 죽음과 그리 멀지 않다는 말이다.” 성과 폭력이 결합된 가장 끔찍한 범죄의 기제가 설명되고 있어서요.
‘플랫폼’에서 우정이 교환되는 플랫폼을 발견한 한편 편집자들은 이제 다음 주제인 ‘우정’을 준비하면서 우정이 아닌 것, 우정의 임계, 우정의 극한을 더듬고 있는데요. ‘에로티즘’ 또한 우정의 임계점이 아닌가 해요. 문득 바타유가 책에서 한번도 우정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 아주 신경 쓰여서…… 나중에 쓴 『에로스의 눈물』을 펼쳐 보니 그는 이렇게 토로하고 있어요.
우리는 에로티즘과 도덕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불합리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한 생각은 에로티즘이 종교의 가장 오래된 미신들과 연결된 데서 기원한다.
역사적인 정확성을 넘어 우리가 늘 주시하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둘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욕망, 불타는 격정이 우리 눈앞에 펼쳐 놓는 것에 사로잡히거나 더 나은 앞날에 이성적인 관심을 쏟거나.
둘 사이에는 아마도 타협점이 있다.
나는 더 나은 앞날을 생각하며 살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앞날을 다른 세계로 보낼 수도 있다. 오직 죽음만이 나를 데려갈 수 있는 세계로…….
어쩌면 이러한 타협점이 불가피했다. 인간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죽음 이후에 올 상이나 벌에 매달리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러한 근심이(혹은 그러한 희망이) 힘을 잃고, 즉각적인 관심과 앞날의 이익이, 혹은 불타는 욕망과 이성적으로 숙고된 타산이 타협점 없이 대치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그 누구도 불타는 격정이 우리를 더 이상 흔들지 못하는 세계를 상상하지 못하고…… 반면 그 누구도 우리가 더 이상 타산에 얽매이지 않는 삶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문명, 즉 인간적 삶의 가능성은 삶을 보장하는 수단들을 합리적으로 예견하는 데 달려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켜 내야 하는 삶 — 문명화된 삶 — 이 바로 그 삶을 가능하게 해 주는 수단들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타산적인 수단들 너머로 그 수단들의 목적 혹은 목적들 — 을 찾는다. (중략)
수단을 향한 추구는 언제나, 최종적으로는, 이성적이다. 반면 목적의 추구는 욕망에 속하고, 욕망은 흔히 이성에 도전한다. 
내 안에서 욕망의 충족과 이해타산이 자주 대립한다. 그래도 나는 욕망 충족을 따른다. 돌연 그것이 나의 최종 목적이 되어 버렸다!
— 조르주 바타유, 윤진 옮김,
바타유의 『에로티즘』! 학부 시절 고전 읽기 모임에서 초반 얼마 정도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은 문자 그대로 무더위에서 살아 남으려 ‘다 벗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존재 너머로 이행하려는 연속성으로서의 발가벗음을 의식하니 새삼 여기저기 적용하고 싶어요. 혼자서 나체인 상태, 상대와 함께 나체인 상태, 몸의 일부만 가리거나 비치는 소재의 옷을 입을 때의 묘한 긴장을 떠올립니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니게 되는’ 위험 앞에 나를 노출하는 순간을요. 물론 완전한 극단을 넘어서지 않는 한 그 역시 불연속의 세계 위에 성립되는 변화이겠지만서도요.
올 여름 사막만큼 먼 곳으로 떠나기로 한 저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내 안의 격정을 발산하는 상상을 해요. 보통 앞날의 이익과 타산에 머리가 아파올 때 떠올리는 망상이죠. 미래의 가능성을 점치며 눈이 팽팽 돌아갈 때는 최후에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한계를 떠올리지만 결국 한계선은 충동에 못 이겨 자아를 깨뜨린 순간 만들어지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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