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지하철의 빈자리

 

 

『작가, 업계인, 철학자, 스파이』의 한 대목
‘플랫폼’ 출간을 맞이해 배너를 바꾼 한편 사람들. ‘고속버스로 통근하는 편집자’ ‘승강장에서 온라인으로 접속하는 편집자’ ‘마을버스 기사님들 파악하는 디자이너’ 등등 교통수단을 둘러싼 재미있는 묘사를 쓰고 있는데요. 이동 이야기는 하기에도 듣기에도 재미있기 마련이네요. 오늘은 지하철에서 일어나는 가장 첨예한 문제를 다룬 에세이 한편을 같이 읽을까요? 바로 교통약자석 이야기입니다.
매일 지하철을 탄다. 앉지 않기로 한 지 오래되었다. 이유는 ‘앉으려고 들면 피곤해서.’ 그런데 며칠 전에는 다리가 좀 아팠다. 을지로4가역쯤에서 자리가 하나 비었다. 7인 좌석 중 끝에서 두 번째 자리였다. 서둘러 갔지만, 앉지 못했다.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분이 눈 깜짝할 사이에 빈자리로 옮긴 것이다. 방금까지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앉으면 되는데, 그럴 수 없었다. 분홍색 임산부석이었기 때문이다.
「교통약자의이동편의증진법」은 교통약자를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를 동반한 자, 어린이 등’으로 정한 뒤, 이들을 위해 교통약자석을 설치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지하철에 고령자를 위한 경로석이 설치된 것은 1980년. 1호선밖에 없던 시절이다. 임산부 배려석은 2013년에 도입되었다. 설치가 법적인 근거를 갖고 있긴 하지만 교통약자가 아닌 이가 앉더라도 처벌 규정은 없다. 처벌하는 나라들도
있다. 한국은 아니다. 우리 법이 관여하는 것은 교통약자석이 적법하다는 것, 딱 여기까지다.
이 처벌 규정의 부재를 좋아하기는 힘든 일이다. 왜 강제하지 않을까? 왜 국가가 좋은 말은 먼저 하고, 정작 교통약자가 실제로 앉는 것까지는 보증하지 않는가? 왜 지하철 이용자들이 온갖 조마조마한 광경을 봐야 할까? 나는 지금 교통약자석에 찬성하는 입장에서 불평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통약자석을 명확한 권리로 볼 수 없다는 회의론 역시 같은 지점을 겨냥하게 되는 건 흥미롭다. 국가는 강제할 자신이 없는 것을 함부로 국민에게 요구해도 될까? 누가 국가에게 교육자 노릇이나 해 달라고 했나? 요컨대 국가의 불철저한 개입이 양쪽 입장의 공통적 슬픔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이 어정쩡한 상태에 좋은 점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며칠 전 지하철의 그 젊은 분을 보자. 그녀는 처벌받을 위험도 없었고 자리를 옮기라는 강요도 받지 않았지만 다른 자리로 옮겼다. 순전히 도덕적 이유로, 자신이 이 자리를 비키는 게 옳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애초에 거기 앉지 않는 편이 더 좋았겠지만, 본인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건 나중의 행동으로 보아 명백하다. 우리는 사소한 거짓말을 뱉은 뒤 비참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낼 때가 있는데, 자격 없이 교통약자석에 앉아 있는 기분도 그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통약자석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치르는 일종의 도덕 시험이다. 거짓말과 다른 점은, 거짓말은 자신의 것만 바로 알 수 있을 뿐이지만 교통약자석 위반은 마치 극장처럼 되어 있는 지하철 좌석 구조 때문에 누구나 잘 관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도덕 시험을 억압적이라고 간단히 규정하지 말기 바란다. 이런 시험은 줄이기는커녕 좀 더 늘어나야 할 종류의 것이다. 만일 코로나 같은 위기 상황에서 국민의 도덕적인 역량이 필요하다면, 그게 이런 일상적인 연습 없이 갑자기 발휘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년의 저서 『학부들의 논쟁』(1798)에서 칸트는 썼다. “선은 자유 상태에서만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국가는 국민을 선하게 만들 수 없고, 단지 자유를 줌으로써 스스로 선하게 될 기회를 줄 수 있을 뿐이라는 뜻으로 읽었다. 뭐든지 세밀하게 법으로 정해 놓는 이상적 사회가 있다면 개인은 도덕적 판단을 안 해도 되니 편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선 위법 아닌 것은 모조리 당당하게 합법이고, 구성원들은 서로가 도덕적 백치임을 발견하고 새삼 놀랄 뿐일 테니까. 우리가 아직 그런 상태가 아님을 확인해 주는 장치가 있는 건 좋은 일이다. 예컨대 비어 있는 교통약자석 같은 것 말이다.
― 김영준, 「지하철의 빈자리」,
기차간. 그곳은 사유가 시작되는 공간…… 김영준 에세이 『작가, 업계인, 철학자, 스파이』 3부 ‘철학자’의 한편인 이 글은 지하철 이용자가 한번쯤 겪어 봤을 임산부 배려석 갈등을 다루고 있어요. 이 책을 만들면서 다섯 번은 넘게 읽은 글인데, 오늘은 “마치 극장처럼 되어 있는 지하철 좌석 구조”라는 말이 눈에 들어오네요. 승객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가운데, 화면 밖에서 느껴지는 좌석 투쟁이 눈앞에 선하구요.
‘플랫폼’ 호의 도입 문장이 “우리는 플랫폼에서 만난다.”인데요. 이때 만남이란 저자의 표현처럼 “생활 속에서 치르는 일종의 도덕 시험”이라고 볼 수도 있겠어요. 이처럼 정돈된 생각을 표현하는 산문을 읽으면 도덕의 의미도 칸트의 의미도 낡은 인상을 벗어나 산뜻하게 다가와요. 도덕이란 “일상적인 연습”일 따름인 거죠.
짜잔! 고속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서울의 회사와 경기도 모처 집 사이를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편집자입니다. 일을 하는 곳에 도착하기 위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동하는 데만 아주 긴 시간을 쓰게 되면, 매일 타고 내리는 장소와 운송수단, 그리고 그곳에 그동안 함께 존재하는 이들에게도 여러 감정이 생기게 될 수밖에 없어요.
작년에 출산 한 달 전까지 계속 출퇴근을 하면서, 임산부석을 앞에 둔 ‘도덕 시험’은 너무 익숙한 경험이었어요. 보통 출퇴근 시간은 제일 붐비는 시간이기 때문에 임산부석이 비어 있는 경우가 없어요. 꾸벅꾸벅 졸고 있거나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이들은 제 앞에 임산부가 서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제가 지금 너무 힘들어서 그러는데 자리 좀 비켜 주시겠어요?”라고 물어보면 그제야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남산만 한 배 혹은 가방에 달랑거리는 분홍색 배지를 볼 수 있었고, 화들짝 놀라 다들 자리를 비켜 주곤 했습니다. 딱 한 번 안 비켜 준 사람이 있었는데, 사실 아직도 그 인상착의를 잊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한 사람만 빼고는, 임산부가 비켜 달라고 직접 말을 걸었을 때 모두가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는 사실도 잊을 수 없지요.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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