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글쓰기는 답답한 일이다.”

 

 

물러섰다가 연결되기
‘연단’이라는 의미로 플랫폼을 탐색해 본 지난 주 레터는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이번 호를 만들면서 주목한 또다른 키워드는 ‘연결’이에요. 승강장뿐 아니라 SNS와 각종 애플리케이션까지, 플랫폼은 사람이, 물건이, 정보가 연결되는 장소니까요.
연결을 대하는 저의 태도는 이중적입니다. 《한편》을 많은 독자들이 읽어 주었으면 하고, 매호 필자들과의 작업이 그다음 단계로 이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너무 많은 정보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을 때면 기진맥진해지기도 해요. 마침표를 하나만 찍지 못하는 버릇이 있는 저는.. 연결의 버거움 앞에서 영영… 말줄임표만을 남기고……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 『오웰의 장미』를 읽다가 글을 써서 독자들과 연결되려는 작가의 일에 대한 대목을 만나 반가웠어요.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글쓰기를 해 왔던 작가 조지 오웰이 정원에 장미를 심고 가꿨던 정원사이기도 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오웰은 1946년 「나는 왜 쓰는가」에서 밝혔던 소신대로 이 땅을 사랑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수선화와 고슴도치와 민달팽이에 대해 궁금해했고, 동식물과 날씨를 관찰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 관심사들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창공으로부터 지상으로 돌아오게 한다. 그것들은 글쓰기의 반대로 상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글쓰기는 답답한 일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또 언제쯤 끝날 것인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작업을 마친 후 몇 달, 몇 년 혹은 몇십 년 후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전혀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글쓰기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싸우자고 나타나지 않는 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대체로 알아볼 수 없는 일이다. 작가로서, 당신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연을 끊지만, 그것은 좀 더 폭넓게 세상과 연결되기 위해, 즉 이 관조적인 상태에서 짜 맞추어진 말들을 다른 곳에서 읽을 사람들과 연결되기 위해서이다. 글쓰기에서 생생한 것은 그것이 오감을 어떻게 자극하느냐가 아니라 상상력에 어떻게 호소하느냐이다. 전쟁터와 탄생과 진창길을, 또는 냄새를 ― 오웰은 그의 책들에 묘사된 악취로 유명해지게 된다 ― 묘사할 수는 있지만, 그래 봤자 그것은 진짜 피도, 진흙도, 삶은 양배추도 아닌, 백지 위의 검은 글자들일 뿐이다. 
― 리베카 솔닛, 최애리 옮김, 
『오웰의 장미』, 67~68쪽에서
거창한 닉네임을 바꿔 달고 멋쩍던 차에…… 말줄임표를 줄이는 방법이란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을 이어가기가 어려울 때 인용을 하면 좋죠. 리베카 솔닛이 글쓰기로 연결되기를 긍정적으로 본다면, 무언가 부정적인 그림을 그리는 푸코도 함께 읽어 볼까요? ‘플랫폼’ 호의 제사를 따온 대목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자문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계와 사유 그리고 진실은 무엇일 수 있을까 하고 한순간이라도 상상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라고들 생각한다. 이는 최근에 이루어진 인간의 출현에 우리가 너무나 눈이 멀어서, 세계와 세계의 질서 그리고 인류가 존재했지만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를 그리 오래전이 아닌데도 이제는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초인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임박한 사건의 형태로, 약속 겸 위협의 형태로 예고한 니체의 사유가 왜 전복의 힘을 지닐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지 쉽게 이해되는데, 회귀의 철학에서 이는 인간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사라지기 시작했고 끊임없이 사라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인간에 대한 우리의 근대적 사유, 인간에 대한 우리의 염려, 우리의 인본주의가 천둥처럼 요란하게 울려오는 인간의 비(非)존재 위에서 평온하게 잠자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속해 있고 인식에 의해 세계의 진실을 활짝 열어 주는 유한성에 우리 자신이 묶여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사실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이 바로 우리의 처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중략)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즉 인간은 지식에 제기된 가장 유구한 문제도 가장 지속적인 문제도 아니다. 누구라도 비교적 짧은 역사와 제한된 지리적 마름질(16세기부터의 유럽 문화)을 검토한다면, 거기에서 인간은 최근에 발견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지식이 그토록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헤맨 것은 인간과 인간의 비밀을 중심으로해서가 아니다. 사실상 사물과 사물의 질서에 관한 지식, 동일성과 차이, 특성과 등가(等價) 그리고 말에 관한 지식에 영향을 미친 모든 변동 중에서, 요컨대 동일자의 그 깊은 역사가 내보이는 모든 국면 중에서 150년 전에 시작되었고 어쩌면 이제 종결되고 있는 중일 단 하나만이 인간의 형상을 출현하게 했다. 그것은 오랜 불안으로부터의 해방, 먼 옛날부터의 막연한 근심에 대한 날카로운 자각, 개인적인 신념이나 사고방식의 올가미에 오랫동안 걸려 있던 것의 객관적인 검토가 아니었다. 즉 그것은 근본적인 지식의 배치에서 일어난 변화의 결과였다. 사유의 고고학이 분명히 보여 주듯이 인간은 최근의 시대에 발견된 형상이다. 그리고 아마 종말이 가까운 발견물일 것이다.
만약 그 배치가 출현했듯이 사라지기에 이른다면, 18세기의 전환점에서 고전주의적 사유의 밑바탕이 그랬듯이 만약 우리가 기껏해야 가능하다고만 예감할 수 있을 뿐이고 지금으로서는 형태가 무엇일지도, 무엇을 약속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어떤 사건에 의해 그 배치가 뒤흔들리게 된다면, 장담할 수 있건대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 미셸 푸코, 이규현 옮김,
441~442쪽, 525~526쪽 중에서
‘인간의 출현은 지식의 배치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난 결과다. 그리고 그 배치가 뒤흔들리면서 인간은 사라질지 모른다.’ 이것이 푸코의 이야기인데요. 1966년 처음 출간된 『말과 사물』을 읽는 2023년 현재 “인간이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라는 말이 독자에게 더 와닿을 것 같아요.
푸코도 잘 모르겠다고 썼지만, 플랫폼이 범람하는 시대에는 막상 내가 누구인지, 뭘 아는지 갈수록 모르겠다는 느낌뿐이거든요. 그게 스마트폰 때문이든 챗지피티 때문이든 말이죠. 역시 글을 쓰면 쓴 만큼만은 내 생각이라고 할 수가 있으니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써야 하는 것이겠네요……. 붉은얼굴 편집자님은 이번에 발간사를 쓰며 어떠셨나요…….
……“글쓰기는 답답한 일이다.” 글쓰기는 말줄임표를 힙겹게 덜어내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요.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음…… 이럴 수도…… 어쩌면 저럴 수도…… 하게 되는데, 글을 쓰려면 어찌되었든 말줄임표를 덜어내고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어야 하잖아요. 틀릴 수도 있고 나의 생각과 다르게 읽힐 수도 있고 훗날 다시 보면 후회되기도 하겠지만, 여하간 읽히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에요. 한 문장 한 문장 말줄임표를 덜어내는 데에는 과거의 제가 책에 그어 둔 밑줄, 동료들과의 대화 그리고 여전히 말줄임표 상태인 원고에 대한 위대한 피드백이 큰 힘이 됩니다.
인용해 주신 문장이 무시무시한데요. 저는 ‘플랫폼’ 호를 만들기 시작하며 읽은 정보철학자 루치아노 플로리디의 책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상호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보고 섬뜩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24시간 언제 어디서든 연결되어 있는 지금을 떠올려 보면 맞는 말 같고, 그 사실이 좀 아득하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플랫폼’에 실린 열 편의 글을 읽고 나서는 오히려 좀 더 차분하게 상호작용의 장소와 모양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비록 ‘호랑이 등에 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처지’이지만요……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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