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연단에 올라서서

 

 

잘 듣고 잘 말하기
여러분은 발표를 좋아하나요? 무대에 오르는 건요? 다음 주 출간될 《한편》의 주제(‘플랫폼’)의 현실 이미지가 무엇이냐고 했을 때 저는 기차역 승강장보다 단상(壇上)이 더 알기 쉬운 그림이 아닌가 했어요. 연단이라고 하면 정치인이나 전문가의 전용 무대를 가리키지만, 플랫폼이 문자 그대로 평지보다 한 단 높은 곳을 뜻한다면 수업시간의 발표나 술자리 건배사도 단상 위의 언어 같단 말이죠.
배민, 구글, 카카오톡이 기차역 승강장처럼 사람들을 어딘가로 데려다 주는 플랫폼들이라면 패션 플랫폼, 독서 플랫폼, 유학 플랫폼처럼 플랫폼 앞에 무언가를 붙인 이름들은 한 단 위에 올라가서 “자, 내가 뭔가 보여 줄게!”라고 외치는 느낌인데요. “자, 내가 뭔가 보여 줄게!” 하고 모두를 주목시키곤 우물쭈물 말끝이 흐려졌던 기억, 생각보다 입이 잘 트여 제가 꺼낸 이야기를 두고 한동안 말이 이어진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60명 강의실보다도 많은 사람 앞에 무슨 말을 꺼내게 될지 상상해 봅니다.
탈레반의 폭력이 극악무도해질수록,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말랄라는 총을 든 탈레반에게 맞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그들의 테러 행위를 직접 폭로하기로 결심한다. “만일 한 남자가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면, 한 소녀가 그것을 바꾸는 건 왜 못하겠는가?”
2008년, 열한 살 말랄라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큰 뉴스 채널인 Geo와 BBC 우르두어 토크쇼에 연달아 나갔다. 방송 출연을 망설였지만, “파키스탄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이 방송을 들으리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용기를 냈다. 말랄라는 열변을 토했다. “어떻게 감히 탈레반이 교육받을 권리라는 내 기본권을 빼앗는 건가요?” 방송 후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하지만, “학교는 계속 파괴되고 있었다. 2008년 10월 7일 밤, 멀리서 연쇄적으로 폭발음이 들려왔다.” 복면 무장 세력들은 상고타 수녀원 부속 여학교와 남학교인 엑셀시어 칼리지에 사제 폭발 장치를 설치해 학교를 폭파시켰다. 심지어 탈레반은 “상고타는 기독교를 가르치는 수녀원 학교이고 엑셀시어는 남녀 공학이기 때문”이라고 사실 관계와 맞지도 않는 범행 동기를 밝히기까지 했다. 2009년 1월에는 전문 무용수로 활동하던 샤바나라는 여성이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탈레반은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행위가 “비도덕적이기에 죽어 마땅하다.”고 버젓이 성명을 발표했다.
말랄라의 절망감은 깊어졌다. 마침 BBC 라디오 폐샤와르 특파원이 탈레반 치하 생활에 대해 일기를 쓸 여교사나 여학생을 찾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난 안 돼요?”라고 물었다. 말랄라는 일주일에 한 번씩 BBC 우르두어 웹사이트에 일기를 올리기로 한다. 2009년 1월 3일, ‘나는 두렵다’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굴 마카이라는 필명을 쓸 수밖에 없었다. 말랄라의 일기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 못지않다는 평가도 받았다. “나는 펜과 그 펜에서 나오는 글이 기관총이나 탱크, 헬리콥터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닐 수 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말랄라는 더욱 확신을 가졌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배우고 있었다.”
― 장영은, 「말랄라 유사프자이, 열한 살에 정치를 시작하다」,
누가 마이크를 주기도 전에 연단에 오르는 용기는 어디서 나올까요? 파키스탄의 여성 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정치인 베나지르 부토가 암살 당한 사건을 계기로 여성을 폭압하는 탈레반에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이슬람 국가 최초의 여성 총리인 베나지르는 망명을 떠난 지 8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지만 탈레반과 결탁한 정적에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그녀는 우리의 롤 모델이었다. 베나지르 부토는 독재의 종식과 민주주의의 시작을 상징했고, 세계에 희망과 강인함의 메시지를 보냈다. …… 그녀의 사망을 확인했을 때, 내 가슴이 내게 말했다. 너도 나아가서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지 않겠니?”
유사프자이의 결연한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뜻을 말하기 전 그만큼 상대의 말을 오래 곱씹었을 시간을 짐작하게 합니다. 남들 앞에 나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더더욱 연단 위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불시에 튀어 나오는 욕망이 아니라면 대체로 내가 뭘 원하는지 알기 어려운 법이니까요. 다만 “각자 자기 이야기만 하기보다는 나의 이야기에 이어지는 상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언젠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까 합니다. 상대의 말을 듣고, 생각하고, 말하지 못해 참을 수 없는 것이 생길 때 팔을 걷어 붙이게 되지 않을까요?
나는 대체로 관찰자다. 말하기보다는 듣기가, 쓰기보다는 읽기가 좋다. 편집자의 주 업무는 잘 읽고 엮는 것이고 소통의 핵심은 경청이니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한 호의 키워드를 편집자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한편》 편집 작업을 3년째 하면서, 나는 소통에는 잘 듣는 것뿐 아니라 잘 말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내 이야기를 꺼내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이다. ‘네가 원하는 건 뭐냐’는 질문 앞에서 나는 여전히 당황스럽다. 하지만 얼버무리기를 반복하다가 깨달은 것은 나의 관심을 꺼내 놓는 일은 괴롭지만 즐겁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건 나의 욕망을 찾아 가는 일이기도 하다.
각자 자기 이야기만 하기보다는 나의 이야기에 이어지는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 훨씬 재미있다. 《한편》은 편집자들과의 대화에서 시작된 주제를 저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튼튼하게 채워넣고, 독자들과의 대화로 이어 간다. 하지만 대화는 자주 갈등을 빚고, 기획의 시작이자 끝인 독자는 많은 경우 보이지 않는다. 이번 호를 만들면서 나는 경제경영서에서 이야기하는 플랫폼의 성공 조건들을 《한편》에 적용해 보았다. 수많은 콘텐츠들이 주목을 끌기 위해 경쟁하는 지금, 이용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소통하는 플랫폼은 콘텐츠 생산자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양식이 된 것도 같다. 그럼 《한편》 역시 플랫폼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성공한 다른 플랫폼에 올라타야 할까?
― 김세영, 「플랫폼에서 현실감 되찾기」,
《한편》 11호 ‘플랫폼’ 중에서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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