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카프카 읽는 날

 

 

당신의 꽁꽁 언 바다를 깨는 도끼
불길에 휩싸인 강렬한 ‘최신 금기’ 이미지에 《사랑의 이해》 드라마 클립과 이미지까지 한 번에 담은 지난 편지, 어떻게 보셨나요? “릿터의 글과 편집자님의 편지를 ‘한 편’으로 읽으며, 읽은 행위는 한번이지만 동시에 여러명과 대화하는 기분이 들어요.”라는 어느 독자 분의 코멘트는 반가운 답장 같았어요.
4월 20일 장애인의 날, 21일 과학의 날, 22일 지구의 날 다음인 지난 일요일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이었다고 해요. 독서가 취미인 여러분은 관련 행사에 직접 참여하셨을지 모르겠네요. 저는 책의 날에 맞춰 새 카프카 단편선이 나온다는 소식에 오랜만에 그의 고독한 세계를 들춰 보았답니다. “늘 있는 사건 하나. 그것의 감내, 일상적인 당혹 한 가지.”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짧은 단편을 소개할게요.
A는 H 출신 B와 중요한 사업을 매듭지어야 한다. 그는 예비 협의를 하러 H로 가는데, 왕복하는 데 각각 십분이 안 걸렸고 집에 와서는 이 특별한 신속함을 자랑한다. 다음 날 그는 다시 H로, 이번에는 사업의 최종적인 마무리를 위하여 간다. 그 일을 하는 데에 몇 시간은 걸리리라 예상해서 A는 새벽같이 떠난다. 그러나 모든 부수적인 상황들이, 적어도 A의 생각으로는, 전날과 조금도 다름없는데도 이번에는 H로 가는 데 열 시간이나 걸린다. 지칠 대로 지쳐 그가 저녁에 H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B는 A가 오지 않는 데 화가 나서 반 시간 전에 A를 만나러 A의 마을로 갔으니, 사실은 그들이 도중에 만났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A에게 기다리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A는 사업이 걱정되어 즉시 떠나 서둘러 온 길을 되돌아간다. 이번에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는데도, 같은 길을 순식간에 간다. 집에 와서 그가 들은 이야기로는 B 역시 A가 떠나자마자 곧바로 H에 왔는데, 대문에서 A를 마주쳐, A에게 사업을 상기시켰건만 A는 자기에게 지금 시간이 없다고, 서둘러 가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A의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B는 A를 기다리려고 여기 머물렀다. 그사이 A가 되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벌써 여러 차례 물었으나 아직도 위층 A의 방에 있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B와 이야기하고 그에게 모든 해명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서 A는 계단을 달려 올라간다. 위층에 거의 다 올라가던 참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다가 그만 뒤꿈치 근육에 열상(熱傷)을 입어 고통으로 까무러칠 지경이 된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다만 끙끙거리고만 있는데, B가 ― 아주 멀리에서인지, 지척에서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 화가 나서 계단을 쾅쾅 디디며 내려가 영영 사라지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린다.
— 프란츠 카프카, 「일상의 당혹」,
전영애 옮김, 『돌연한 출발』 중에서
‘왜 오늘따라 일이 이렇게 꼬이지?’ 싶은 날이 있지 않나요? 늘과 같은 루틴을 따랐을 뿐인데 상황이 복잡하게 흘러가는 그런 날이요. 카프카의 세계에서 그 뒤엉킴은 커지다 못해 엉킨 세계와 갈 곳 잃은 ‘나’만이 남는 이상한 사태로 그려집니다. 십 분 거리가 몇 시간으로, 몇 시간이 한나절로 늘고 간신히 계단 한 층까지 거리를 좁힌 후에도 끝내 만나지 못하는 오묘한 엇갈림은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미로에서 길 잃은 누군가의 모습을 보는 듯해요.
법 앞의 문에 선 시골 사람이나(「법 앞에서」), 근사한 굴을 파놓고 바깥 통로와 대치하는 나(「굴」)의 이미지도 이와 비슷하고요.
그들 중 하나를 포획하려고 이미 많은 굴을 파 보았으나 아직 하나도 찾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아주 형편없이 작은 동물로, 내가 아는 것들보다 훨씬 더 작은데, 다만 그들이 내는 소리가 더 크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나는 파헤쳐 놓은 흙을 조사한다, 흙덩어리가 잘게 부서지라고 높이 던져 올린다, 그러나 소리를 내는 자들은 그 아래에 없다. 서서히 나는 통찰한다, 그렇게 아무 데나 파 보는 것만으로는 아무 성과도 있을 수 없음을. 아무 데나 파 보는 건 내 굴의 벽들을 마구 헤집어 놓을 뿐이다, 여기저기를 황급히 긁어 흐트러뜨린다, 구멍들을 메울 시간이 없다, 많은 곳에 벌써 길과 시야를 가로막는 흙무더기들이 쌓여 있다. (……)
이제 나는 나의 방식을 바꾸려고 한다. 소리 나는 방향으로 큰 구덩이를 정식으로 만드는데, 모든 이론을 떠나, 나는 소리의 진짜 원인을 찾기 전까지 이 일을 멈추지 않겠다. 그다음에는 구덩이들을 내 힘이 닿는 한에서 없앨 것이고, 그러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확신을 얻게 될 터다. 그 확신은 나에게 안심, 아니면 절망을 안겨 줄 것이다, 어떻든 간에 이것 아니면 저것일 테니, 의심의 여지가 없고 정당하리라. 이 결심이 내겐 유쾌했다. 내가 지금까지 모든 것을 행해 오며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생각이 든다, 귀환의 흥분에 빠져, 아직 지상 세계의 근심에서는 벗어나지 못하고 굴의 평화에도 완전히 수용되지 못한 채, 내가 그렇게 오래 굴 없이 지내야 했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민감해져서, 시인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상한 현상 하나 때문에 나의 분별을 모조리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럼 무엇이라는 말인가? 긴 사이를 두고서 들리는 가벼운 사각사각 소리,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익숙해질 수도 있는, 아니, 익숙해질 수 없겠지만, 잠정적으로 곧장 어떤 대응을 하지 않은 채 한동안 관찰해 볼 수도 있는 것, 가령 몇 시간 동안 이따금씩 귀를 기울이고 결과를 참을성 있게 기록해 둘 수도 있는 것 말이다. 나처럼 벽에서 귀를 떼지 않고, 벽을 따라가며 그 소리가 들릴 때면 거의 매번, 진짜 무얼 찾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내면의 불안에 상응하는 그 무언가를 행하기 위해 땅을 파헤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 프란츠 카프카, 「굴」,
전영애 옮김, 『돌연한 출발』 중에서
일요일이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이었다고…… 뭘 했더라…… 읽어야 하는 책을 몇쪽 겨우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늘 인기 있는 카프카 인용구의 맥락을 트위터에서 보고 놀라기도 했어요. 유명한 ‘책은 도끼여야 해’의 앞부분이 너무 어두웠던 거예요.
“우리에게는 마치 불행처럼 다가오는 책들이 필요해, 우리를 매우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 우리가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한 어떤 이의 죽음 같은 불행, 모두가 사라져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 홀로 남겨진 불행, 말하자면 스스로 삶을 끝내야 할 것 같은 불행 말이야.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갑자기 카프카에 기대고 싶어지는데…… 책을 읽기 싫은 이유가 딱 이래서란 말이죠. 책에 중요한 내용이 있다는 것, 읽을수록 말할 게 많아진다는 것, 글도 잘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왜 안 읽는가. 결정적인 한 권의 책에 담긴 “우리를 매우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을 피하고 싶으니까. 그럼 이런 우울한 마음을 어떻게 타넘어서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한 어떤 이의 죽음 같은 불행”이 담긴 책까지 읽었더라? 알약 편집자님의 경험은 어떤가요.
리트리버 편집자님처럼 ‘책은 도끼’ 앞 구절을 이번에 처음 봤어요. 카프카가 친구 오스카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구절인데요. 카프카는 1800쪽에 달하는 책을 처음엔 장난스럽게, 내용에 점점 빠져들면서는 입구가 큰 돌덩이로 막힌 깊고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빛과 공기를 찾으려 애쓰듯 온 힘을 다해 집중했다고 해요.
좋아하는 사람의 죽음만큼 모든 것을 깨뜨리는 책이라, 책과 그 정도로 무서운 사이가 되려면 좋아한다는 감각부터 다시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순서대로, 계획대로 해 본다는 발상은 ‘H로 가는 데 십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같은 사실의 영역에 속하겠지만요.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그가 무슨 특별한 나쁜 짓을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로 시작하는 『소송』은 대학 때 가장 몰입해 읽은 소설이었어요. 20세기 초의 인물 K와 21세기의 내가 한 공간에 있듯 누구도 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 공포를 긴장 속에 따라갔죠. 전날과 다름 없이 책장을 넘겼을 뿐인데 돌연 길을 잃고 엉킨 세계와 나만 남는 감각은, 외롭고 냉정하지만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되는 그런 불행 아닐까요.
수요일 낮 11시, 인문잡지 《한편》과 단행본 ‘탐구’를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민음북클럽 오픈!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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