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여행길에 한 공부

 

 

10년 근속휴가 후기
한편 탐구단 설문조사 결과를 보고하는 지난번 웅장한 레터에 여러 반응이 도착했어요. 오랫동안 한편이 꾸준히 발행되면 좋겠네요. 감사하는 마음을 소소하게 표현해봅니다.”라는 코멘트에 마음이 부드러워졌어요. “저 같은 경우 탐구시리즈는 처음에 핸디하고 예뻐서 읽다가 생각보다 내용이 깊고 어려웠던 기억이 있어요 그렇다고 글의 깊이를 수정해달라는 건 절대 아니고요! 뒤에 편집자님의 해설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끝끝내 완독하고 해설로 전체 흐름을 다시 확인하고, 제가 제대로 읽은 건지, 놓친 부분은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습니다:)”라는 코멘트 알약 편집자님 보고 있나요? 보통 책의 소개글을 편집자가 쓰는데, 편집자 글을 책에 넣을 수 있을까를 두고 회의를 해보고 싶네요. 
그사이 저는 긴 휴가를 다녀왔어요. 이름하여 10년 근속휴가라 해서…… 민음사에서 일한 지 10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행기 대신 기차를 타고 한국을 여행하면서 잠도 자고 책도 읽고 했는데요.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서 생각해 보니 그것도 다 공부하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무슨 여행 중에 공부냐 하면 내 마음에 대한 공부…….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
그리고 정말 시간은 있겠지
창유리에 등을 비비고
거리를 따라 미끄러지듯 가는 노란 안개에게;
시간은 있겠지, 암 있고말고,
네가 만날 얼굴들을 만나기 위해 얼굴을 꾸밀;
사람을 죽이고 애를 배게 할 시간이,
문제를 들어 네 접시에 놓을
손의 일과와 세시에게도;
너를 위해서도 시간, 나를 위해서도 시간이 있겠지,
아직 백 번은 망설일 시간이,
백 번 보고 또다시 볼 시간이,
토스트 곁들일 차를 마시기 전에. ……
그리고 정말 시간은 있겠지
‘해낼 수 있을까?’ ‘해낼 수 있을까?’ 자문할. ……
왜냐하면 나는 그들을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모두 다 ─
저녁과 아침과 오후 일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커피 스푼으로 내 삶을 재어 왔기 때문에;
먼 방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깔려 점점 여리게로 되다
들리지 않게 되는 목소리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 내 어찌 감행할 수 있으랴?

그리고 나는 그 눈들을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모두 다 ─
공식적 문구로 사람을 정해 버리는 눈들,
내가 공식으로 졸아들어, 핀 위에서 허우적거릴 때,
내가 핀에 꽂혀 벽에서 꿈틀거릴 때,
그때 어떻게 나는 일상생활의 모든 꽁초를
뱉어 버리기 시작할 것인가?
  그리고 내 어찌 감행할 수 있으랴?

— T. S. 엘리엇, 황동규 옮김,
『황무지』 중에서
휴가를 떠나기 전에는 딱 이 시의 프루프록과 같은 상태였죠. “저녁과 아침과 오후 일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커피 스푼으로 내 삶을 재어 왔기 때문에”. 제목조차 『황무지(The Waste Land)』인 엘리엇 시선을 펼치면 산산이 흩어진 현대인의 마음을 마주 볼 수 있어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4월이니,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유명한 시구가 있는 이 시집은 사무실에 앉아 있는 오늘도 펼쳐들고 싶네요. 
기항지 1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중의 어두운 용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논 1

쌀이 불쌍하다
우리는 논에서 죽었다
십삼촉보다 어두운 가을 어스름에
무섭게 밟히는 소리들
숨쉬어 보아라
낫날이 빛나지 않는다
시간의 전모가 빛나지 않는다
그러나 움직인다
해오라기의 형상이 한 떼 날아가고
호박보다 밝은 달이
수수밭 위에 떠 있다
수수밭이 죽어 있다
그러나 움직인다
한 치 한 치가 어두움의 땅이다
움직인다.

삼남에 내리는 눈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포(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목매었으련만, 대국 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 황동규, 『삼남에 내리는 눈』 중에서
황동규 시선집 『삼남에 내리는 눈』은 시인의 가장 오랜 탐구 주제인 눈에 관한 시편들을 담고 있는데요. 저는 도처에 꽃이 핀 보성의 활성산 숲길을 걸으면서 처음에는 신동엽을 생각했어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진달래 산천」) 그러다 신동엽의 장편 서사시 「금강」이 떠오르고, 서사시의 주인공 전봉준이 떠오르고, 전봉준에 대해 쓴 또 다른 시인이 떠오른 거죠. 
황동규 시인이 번역한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에서는 내가 핀에 꽂혀 벽에서 꿈틀거릴 때”를 생각한다면, 「기항지 1」에서 여행자는 “걸어서 항구에 도착”“조용한 마음”을 품게 돼요. 그리고 논들, 사방에 펼쳐진 논들을 보며 “움직인다”(「논 1」)라고 반복해 말하게 되고, 나의 마음에 비치는 역사 인물의 마음을 그리게 되고(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이제 저쪽에 있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귀 기울여 보는 거죠.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보아라“.(「삼남에 내리는 눈」)
순천, 보성, 벌교를 걸어다니면서 이런 시들을 생각했는데, 북쪽으로 춘천에 갔다가는 헌책방에서 아래 책을 발견한 거 있죠.(남춘천역 바로 뒤에 있는 ‘아직 숨은 헌책방’ 추천!) 정병규·류희정 디자인의 ‘오늘의 시인총서’로, 이건 현행본과도 다르고 초판본과도 다른 표지예요. 물론 샀습니다. 책날개에는 김병익 평론가의 귀중한 해설이 아래처럼 실려 있는데요. 이 해설을 오늘 읽고 고등학교 때 수능 공부하면서 접한 「즐거운 편지」(1961)에서 「조그만 사랑 노래」(1978)까지 그토록 좋아했던 황동규의 시적 변화를 이제 이해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즐거운 공부 이야기는 늘 사람들과 나누고 싶죠.
“초기의 고뇌에서 자기 삶의 내부로 비극의 비전을 비쳤던 그는 차츰 자기 밖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확대를 수행하면서 민족의 약소함과 황량한 우리 삶의 풍경을 묘사했고 이 참담한 상황을 더욱 공포스럽게 만드는 힘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무력감을 표명했다. 아마 이러한 정신의 전개는 사랑의 변증법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사랑은 이웃으로 번지고 드디어는 삼남(南) — 이 가냘픈 한국과 그곳에 괴로이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로 확산되었다. 이 사랑을 확실히 하고 더 큰 사랑으로 만들기까지 그는 많은 고뇌와 절망, 안타까움과 자조를 극복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극복했다.
그는 가장 확실한 시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변증을 시를 통해서 수행했고 언어로 그것을 증명했다. 그의 섬세한 감각, 날카로운 감수성은 고도로 세련된 지성으로 정련된다. 그의 시가 격앙될지언정 흥분하지 않고 분노할지언정 아우성치지 않으며 시정의 밑바닥을 그릴 때에도 그의 말은 남루해지지 않는다.”
— 김병익, 「사랑의 변증과 지성」,
황동규, 『삼남에 내리는 눈』 중에서
리트리버 편집자님의 10년 근속휴가! 멋지고 부럽고 후기가 궁금했는데 시집 두 권과 함께한 마음 공부 이야기를 듣게 되었네요. 황동규 시인의 시 세 편을 연달아 읽으니 조용한 마음에 맑고 강한 힘이 스미는 것 같아요. “그러나 움직인다”, “움직인다.” 현실의 삼엄함이 느껴지지만 어두운 하늘에 떠다니는 눈송이과 새들의 움직임이 아름답게 다가와요. 처음 보는 표지에 큼지막하게 들어간 단정하고 힘 있는 필체도 눈에 들어오네요.
저는 주말에 별생각 없이 남산을 찾았는데 벚꽃과 개나리가 만발해 있었어요. 벌써 꽃이 피고 꽃비가 내리다니 눈앞의 장면을 믿을 수 없었는데, 4월의 첫날이었더라고요. 꽃놀이 나온 사람들로 조용하지는 않았던 남산을 걸으면서 저는 『내 어머니의 자서전』의 작가 저메이카 킨케이드가 쓴 글의 한 대목을 떠올렸어요. 여름에 축 처진 채로 핀 보라색 등나무꽃을 보며 느끼는 슬픔에 대한 건데요. 작가는 등나무꽃을 보며 겨울의 죽음, 다시 돌아온다는 암시도 없는 오래전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 같은 슬픔을 느낍니다. 봄의 한가운데에서 어쩐지 겨울의 흔적을 찾아보다가, 겨울옷을 들고 세탁소에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산책을 마쳤어요.
레터를 마치며 제철 시 한편을 함께 읽어 볼까요? 오늘 ‘이 계절에 꼭 복용해야 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받아 즐겁게 읽은 함민복 시인의 「봄꽃」이에요.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
민음사
1p@minumsa.com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1길 62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02-515-200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