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 도둑의 일기』 이상하고 기묘한 고백 혹은 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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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비슷한 반응이겠습니다만, 처음 『산소 도둑의 일기(Diary of an Oxygen Thief)』를 마주하였을 때 퍼뜩 떠오른 생각은 “저자가 누구야? Anonymous? 익명이라고? 책이 뭐 이래.”였습니다.(여기에 덧붙여, 그런데 ‘산소 도둑’은 또 뭐지?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요.) 확실히 ‘기묘한’ 책이었고, 과연 (이 책의) 정체가 무엇인지 점차 호기심이 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기로 작정한 책인 만큼 거의 모든 정보가 불명이었습니다. 마치 르네상스 시기의 금서처럼, 이 책도 무슨 연유에서인지 ‘2006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처음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스피노자가 교회의 눈을 피해 ‘도발적인 서적’을 펴냈듯이 말이죠. 물론 ‘익명인’의 글입니다만, 위키리크스(WikiLeaks) 같은 종류의 치명적인 고발도, 목숨 건 주장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정도 불경하기는 하지만…… 여하튼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설정처럼 느껴졌습니다.

『산소 도둑의 일기』는 위키백과에 따르자면 일단 ‘자서전’으로 분류돼 있습니다만, 이 책을 읽고 편집하고, 또 여러 분석과 서평을 두루 살펴본 결과, 정녕 ‘자서전’으로 여겨도 되는지, 저로서는 다소 회의적입니다. 이 책의 후속작에 해당하는 『사탕 가게의 카멜레온(Chameleon In A Candy Store)』만 보더라도 ‘로맨스’로 분류되어 있으니, 아무래도 ‘자서전의 탈을 쓴 픽션이 아닐까?’ 하고 그저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서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자 스스로 이 책을 둘러싼 모든 의혹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이상, 그 누구도 섣불리 단정할 수 없겠지요.

『산소 도둑의 일기』는 얼핏 보면, 카사노바의 『내 생애의 역사』 같은, 여성 편력에다 온갖 허풍을 곁들인 자화자찬처럼 읽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산소 도둑의 일기』 속 화자는, 물론 카사노바처럼 파렴치한 난봉꾼이기는 합니다만, 자신을 변호하는 데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자기 딴에는 ‘변명’을 늘어놓고 있지만, 글쎄요, 오히려 상당히 파괴적입니다. 오히려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던 장자크 루소의 『고백』을 연상시킨다고 할까요.

단지 입소문만으로 《뉴욕 타임스》, 아마존, 아이튠즈 베스트셀러를 석권한 이 책의 대다수 독자는, 벌써 예상하셨겠지만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 책을 선택했을까요? 무려 “나는 여자들에게 상처 주기를 좋아했다.”라고,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악덕을 과시하는 이 책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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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우리에게 한 짓, 그들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자 한 동기,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 함부로 허락해 버린 부분을 통찰할 수 있었습니다.” – (Martha)​

“이 소설은 화자가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여자들에게 정신적으로 상처 주는 일을 즐긴다고 고백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나는 과거의 관계들을 되돌아보며, 내가 데이트 했던 상대들의 면면을 다시 살피게 되었습니다.” – (Grace)​

“이 책은 우리에게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합니다. 익명의 저자는 내게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먼저 무엇을 살펴야 하는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 (Eliza)

 

……이것은 서평 중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만, 수많은 여성 독자들이 ‘산소 도둑’의 사악한 고백을 통해 과거 혹은 현재의 ‘끔찍한 관계’를 바로 보게 되었다고 증언해 주었습니다. 물론 판단은 우리 각자의 몫이겠습니다만…….

 

사실은 누군가 나보다 뛰어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을 숭배하듯 잔뜩 떠받드는 방식으로 나의 분노를 숨기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겉으로는 내가 마음 넓고 관대해 보이므로, 칼을 꽂아 넣으려 할 때조차 신뢰받을 수 있었다. - 본문에서

 

열등감, 편집증적 망상 등 여러 건강하지 못한 감정들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먹잇감을 찾아 배회하고 있습니다. 『산소 도둑의 일기』는 그런 (비겁한) 포식자의 이마에 어떤 표식이 새겨져 있는지를 미리 일러 줍니다. 우리는 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책 표지 자체가 일종의 ‘현상 수배 공고문’임을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익명의 저자가 “반드시 이 사진으로 표지를 제작하라.”라고 힘주어 강조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요.

글 : 담당 편집자 유상훈

익명인 | 옮김 박소현
연령 20~80세 | 출간일 2019년 4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