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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을 찾는 일은 매력적입니다. 도서관에 가면 ‘~기원’이라는 형식의 제목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요, 그만큼 기원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에서 ‘유’가 되는 상황에는 희망과 절망이 있고 좌절과 시련이 있으며 무엇보다 그 모든 과정들을 겪어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원을 찾는 일은 결국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려는 ‘열심’을 만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과거에는 현재도 있고 미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원이라는 과거를 향해 계속 문을 두드리는 이유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볼 수 없는 현재와 미래를 만나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대소설의 시대』는 18세기 ‘백탑파’ 다섯 번째 이야기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중심이었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이야기의 세계를 형성해 왔던 ‘백탑파’가 이번에는 새로운 기원을 찾습니다. 바로 장편소설의 기원입니다. 그런데 이때 장편소설이, 지금 우리가 쓰는 그 장편소설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200권을 훌쩍 넘어가는 이 소설들은 수년에 걸쳐서 읽고 또 읽어야 하는 장대한 스케일의 책입니다. 독자들은 책을 필사하며 읽고, 작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밀고 나가고… 마치 작가와 독자가 한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권차가 늘어 갈수록 독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고, 어떤 지점에 이르러서부터는 감히 1권부터 읽을 엄두들 낼 수 없는 세계. 작가로서도 여간 힘든 세계가 아닙니다.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한번 들어선 길에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세계. 이 시대 장편소설은 읽기가 쓰기를 견인했고 쓰기가 읽기를 견인하며 만들어진 하나의 거대한 ‘문학 공동체’가 아니었을까요. 그 안에서 작가와 독자는 함께 늙어 가고, 새로운 작가도 탄생하며, 그 작가의 새로운 독자도 만들어지는.

 

‘문학 공동체’는 소설을 통해서만 진실을 드러낼 수 있었던 사람들이 선택한 진실의 매체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거대한 공동체의 주인공이 속속 여성들로 밝혀졌다는 사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소설이라는 매체가 조선 후기 여성들에게 어떤 존재였을지 가늠하게 해 줍니다. 그때만이 아닙니다. 소설만이 드러내는 진실이 있다는 사실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낮의 언어가 아니라 밤의 언어로, 빛의 언어가 아니라 그림자의 언어로 들추어낼 수 있는 이야기들. 『대소설의 시대』는 지배의 언어로 쓰였던 정조 시대를 소설의 언어로 재조명합니다.

 

『곽장양문』, 『완월회맹연』『임씨 삼대록』과 같은 고전 소설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또한 이 소설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결혼, 가문, 꿈, 현실, 삶, 죽음… 세기를 거듭해도 인생사의 핵심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1700년대 결혼, 가문, 꿈, 현실, 삶, 죽음은 그들의 내면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요. 각 챕터마다 절묘한 포인트에서 등장하는 고전 작품들과의 만남은 300년 전 이야기와 나누는 대화 같습니다.

 

『대소설의 시대』는 소설의 기원을 찾습니다. 그 길에서 우리가 만나는 건 과거의 소설이 아니라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희망과 절망, 좌절과 시련,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마음들입니다. 우리가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토록 생생한 마음들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과거의 마음과 현재의 마음, 그리고 미래의 마음이 만나는 곳, 『대소설의 시대』입니다.

민음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