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가 되기 전에 나는 안상수체의 안상수가 사람 이름인 줄 몰랐다. 도대체 신명조와 신신명조의 어디가 다르다는 걸까? 내가 속할 곳이 그 둘을 구분하는 세계일 줄이야. 서체를 돈 주고 사서 쓴다는 개념마저 없었으니 그때 내 무지는 책 놓고 글자도 구분 못하는 까막눈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편집자가 되고 제일 먼저 눈을 뜬 것도 서체였다. 고딕과 명조라는 양대 서체 아래 이름도 신기한 독립 서체들을 거느리는 선배들만큼은 아니더라도 필요에 따라 명조와 고딕을 구분하고 더듬더듬 신명조를, 신신명조를 구분해 나갔다. 책 만드는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조금씩 서체의 맛을 알아 갔다.

사진, 일러스트, 회화……. 표지 디자인은 다양하다. 그 다양한 디자인들 중에서 구체적인 이미지 없이 꿋꿋하게, 혹은 자신 만만하게, 서체로만 승부하는 표지들이 있다. 이른바 타이포그래피. 내가 편집한 책들 중에는 인상적인 타이포그래피 표지들이 적지 않다. 아래 표지들 중 가장 왼쪽에 있는 것은 김희진 작가의 소설집 『욕조』인데, ‘욕조’라는 활자를 실핀으로 나타내 구체적인 대상물로서의 ‘욕조’를 은근하게, 그러면서 누가 봐도 욕조스럽게 표현했다.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도 ‘욕조’의 디자이너가 만든 표지다. 이번엔 못. 못을 이어 붙인 글자들이 불안하게 날선 청춘들의 이야기, 박민정 소설의 영혼을 전달해 준다.

(왼쪽에서부터 『욕조』,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 『배삼식 희곡집』)

(왼쪽에서부터 『욕조』,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 『배삼식 희곡집』)

『배삼식 희곡집』 표지에는 B컷이 없다. 처음 표지가 최종 표지다. 처음 시안을 봤을 때, 품질 마크 ‘검’을 봤을 때처럼 ‘당연한’ 느낌이 들었다. 새로웠지만 자연스러웠달까.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정말 그랬다. 작가 이름을 이렇게 전면적으로, 여백 없이 배치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 데서 오는 낯섦이 있었지만 직선과 곡선이 조화롭게 섞여든 이미지가 주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은근히 따뜻하고 은근히 날카로운 분위기가 배삼식 문학과 딱 맞다고 느꼈다. 다소 ‘클래식’한 작가의 이름이 심플하고 모던해 보이기까지 한 것도 우리만의 착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디자이너는 ‘해학’을 생각했다고 했다. 배삼식이라는 이름 자체에도 들어 있고 배삼식의 희곡에도 들어 있는 정서, 해학. 해학을 설명하는 말은 한둘이 아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표현은 이거였다. ‘익살스럽고도 품위가 있는 말과 행동.’ 극작가 배삼식의 문학은 대개가 그렇게 익살스러우면서 품위 있는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배삼식 문학에 유머 없는 풍자는 없고 풍자 없는 이야기도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 표지, 하회탈의 웃음을 닮은 것 같다. 나는 혼자 이걸 ‘배삼식체’라고 부르면서 잘 만든 글자 하나는 열 그림, 열 사진 안 부럽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앞에서 보고 옆에서 보고 뒤에서 봐도 볼매.화면으로 알 수 없는 질감까지 표현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

민음사 편집부 박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