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각종 추천서 목록만 보면 눈이 벌게서 거기 올라와 있는 책들 제목을 달달 외던 시절이 있었다. 브리태니커에서 발행하던 ‘서구의 명저(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 시리즈1)나 클리프턴 패디먼의 『평생 독서계획』 같은 목록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에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Times Literary Supplement)》에서 선정한 ‘전후 가장 영향력 있었던 책 100선’2)이라는 희한한 목록이 소개됐다. 저자명과 책명을 외우던 때라 거기 올라온 저자들은 거의 다 알 만했는데,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이라는 이름은 무척 생소했다. 알고 보니 세계적인 법학자였는데, 도대체 이 책이 뭐기에 법학 책이 이런 목록에 오를까 궁금했던 기억이 있다.

세월이 흘러 이 저명한 법학자의 유작을 맡게 되었다(본문 편집은 다른 편집자가 맡으셨다). 책 제목도 특이했다. 원제는 『고슴도치를 위한 정의론(Justice for Hedgehogs)』, 표지에는 정말 고슴도치 한 마리가 있다. 무슨 뜻인가? 여기서 ‘고슴도치’는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에 의해 유명해진 아르킬로코스의 시구,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큰 것 하나를 안다”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드워킨은 이 책을 통해 정의, 평등과 자유, 법과 민주주의 등 수많은 가치들을 관통하는 ‘큰 것 하나’를 집요하게 탐구함으로써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어려운 판단들을 돌파하고자 한 것이다.

드워킨은 바로 이 한 가지, 가장 중요한 하나를 ‘잘 사는 것(living well)’으로 본다. 남 보기에 성공한 ‘좋은 삶(good life)’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재능이나 부, 미모와 상관없이 자기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고 훌륭하게 살아 내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삶에 대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터질 듯 충만하다. 모든 동물 중 분명히 부조리한 이 상황을 의식하고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인간뿐이다. 죽음이라는 작은 언덕 바로 아래 우리가 살면서 찾을 수 있는 가치는 오로지, 우리가 실제 그렇게 찾고 있듯이, 부사적인 가치(‘잘 산다’고 할 때의 ‘잘’과 같이 ‘어떻게’와 관련된 가치들)다. 우리는 삶의 가치(삶의 의미)를 잘 사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잘 사랑하고, 그림을 잘 그리고, 글을 잘 쓰거나 노래를 잘 부르는 것에서, 또는 다이빙을 잘하는 것에서 가치를 찾듯이 말이다. 삶에서 그 외의 영속적인 가치나 의미는 달리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부사적 가치는 충분한 가치이자 의미다. 사실 그것은 경이로운 것이다.”

드워킨은 이 ‘잘 사는 것’이라는 화두를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로 삼아 도덕과 윤리, 자유와 평등, 법과 정의, 민주주의와 정부 등 듣기만 해도 벅찬 우리 시대의 큰 주제들을 촘촘하게 엮어 나간다. ‘잘 살기 위해선’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자유와 평등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 법관은 어려운 문제 앞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그는 논리적이면서도 설득력 있게 ‘좋은 세상’을 위한 그림을 한 칸씩 채워 나간다. 그렇게 700쪽 넘게 그의 말에 따라가노라면, 우리가 늘 궁금해하던 중요한 갈림길을 모두 거친 듯한 뿌듯함에 전율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와 향연을 만끽하고 돌아가던 이들의 심정이 이랬을까. 법철학과 윤리학이 서로 녹아들고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이 떼어 낼 수 없이 이어져 있다는 명징한 자각 앞에서, 나는 이 책이야말로 드워킨의 최후 저작3)이자, 최고의 저작이라고 단언한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편견과 차별에 맞서 올곧은 목소리를 내 왔던 박경신 교수는 이 책을 번역하느라고 몇 년의 시간을 보낸 후 절절한 해제를 써 주셨다. 그분의 말로 추천사를 대신할까 한다.

“각자의 삶을 고독하게 써 나가는 60억의 사람들 중에서 특히 다음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부모님의 권고를 어기고 배고픈 예술가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 신이 동성애 차별과 같이 비도덕적인 것을 주문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 문화 상대주의와 보편적 인권관 사이에서 번민하는 사람들, 자유의지와 규정론의 충돌을 해결해 보겠다는 야망을 한 번이라도 품었던 사람들, ‘표현에는 책임이 따른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 ‘민주주의가 차악’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궁금해하는 사람들, 자유와 평등이 충돌한다고 생각해서 자유주의를 포기한 사람들, 순수 문학과 참여 문학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들 등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으로서 삶을 잘 살아 낼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다. 어떤 신앙을 따르더라도 그렇다. 잘 살아 내기를. 모두에게 행운을 빈다.”

민음사 편집부 신동해


 

3) 출간연도로는 『신이 사라진 세상(Religion Without God)』이 유작이지만, 자신의 주 분야인 법학과 정치 철학에서는 『정의론』이 마지막 저작이다.

연령 20세 이상 | 출간일 2015년 4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