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벗과의 대화』 고전으로 만나는 원조 ‘마니아’ 원조 ‘오타쿠’

 

공교롭고도 오묘하지요. 이다지도 인연이 딱 들어맞다니! (중략) 그대가 무인이 아니요 내가 농사
꾼이 아니라서 함께 선비가 되었으니, 이야말로 크나큰 인연이요 크나큰 만남입니다.그렇기는 하
지만 주고받는 대화가 구차하게 같거나 행하는 일이 구차하게 맞아떨어진다면,차라리 천년 전 옛

사람과 벗하고, 백 세대 뒤의 사람을 미혹시키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안대회 교수의 신작 『천년 벗과의 대화』는 연암 박지원의 글에서 그 제목을 빌렸다. 바쁜 삶의 질주 속에서 때로는 도움을 구하고자 때로는 위안을 얻고자 시간을 쪼개어 친구를 만나고 대화를 나누지만 오히려 더욱 공허하고 무료해질 때가 있다. 안대회 교수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주히 세상을 돌아다니기보다 책을 통해 옛 선인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벗할 수 있으며, 그런 사귐이 훨씬 가치 있다고 이야기한다.

고전을 통해 만나는 벗이라 하면 막연히 고루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오늘의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삶의 모습에 깊이 공감하고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에 깜짝 놀라기도 하며 현대인이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가치들을 돌아보게 된다.

이를테면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유득공은 벼루에 심취한 나머지 친구의 명품 벼루를 무작정 들고 내빼고는 그런 취미 생활을 전문적인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려 빼어난 문예 작품을 남겼고, 원굉도는 객지에서의 적막감을 꽃병에 꽃을 꽂아 두고 보는 취미 생활로 극복하면서 “내뱉는 말이 무미건조하고 면목이 가증스러운 세상 사람은 모두가 벽(癖)이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서와 이광사는 모두 벼슬을 하지 않은 채 학문과 서법에 전념하여 탁월한 경지에 오름으로써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확립했고, 장서가 이명오는 빌려 본 책을 주인에게 돌려보내며 정인을 이별하는 것 이상의 아픔을 절절히 노래하는 등 서치(書痴)의 행태를 보였다. 남이 뭐라 하든 말든, 출세에 도움이 되든 되지 않든, 자신을 사로잡은 일에 전심을 다해 몰두한 사람들이다.

박제가는 “독창적인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사람만이 능히 할 수 있다.” 하였고, 명나라 문장가 장대(張岱)는 “사람이 벽이 없으면 더불어 사귈 수가 없다. 깊은 정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며, 청나라 문인 장조(張潮) 또한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사람은 벽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길치나 도벽 등의 말에서 보듯 부정적 뜻을 담고 있지만, 치(癡)와 벽(癖)은 ‘마니아’적 열정을 품은 개성으로서 선인들에게는 창조의 원천이었다.


 

편집부 박향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