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동물보다 동물원이 많은 경우

 

 

*설문조사 링크를 수정해 다시 보내드립니다.*
《한편》을 같이 읽어요! 뜨거운 여름입니다. 무지하게 더운 나날이에요. 이처럼 덥고 습한 여름을 어떻게 날 수 있을까요? 사람들과 주고받는 반려견 사진, 극장에서 본 머리를 날려버릴 만큼 재미있는 영화가 잠시 숨을 트이게 하는데요. 콘텐츠를 한참 소비하다가는 멍해지고, 콘텐츠를…… 책을 팔아야 한다!라고 고민하다가는 멍해지는 가운데 오늘은 두꺼운 역사책을 펼쳐 보았습니다. 마침 《한편》 ‘콘텐츠’에서도 다뤘던 동물콘텐츠 이야기가 나오네요. 민음사 사람들이 경외하는 『하버드-C.H.베크 세계사』입니다.(1300쪽, 두꺼움)

동물 전시에서 인간 전시까지

19세기 말은 연결의 시대였던 만큼 동물의 수집과 전시도 급속히 확대되었다. 이전 수 세기 동안은 이국적 동물을 가진 순회 동물원이 오락과 기업 활동의 일반적 형태였지만, 19세기 후반부 들어서는 고정 동물원이 순회 동물원의 매력을 압도하고, 새로운 ‘과학적’ 동물원이 그 시대를 특징짓는 포괄적・조직적・범세계적 수집의 표현이 되었다.

 

장 들라쿠르(Jean Delacour)야말로 동물 수집으로 초국적 네트워크를 일궈 낸 대표적 인물이었다. 많은 사람이 세계 최고의 사설 동물원으로 간주한 것을 만들고, 그의 이력에도 나타나듯 개인 수집관에 지나지 않던 동물원을 공공 기관으로 변모시킨 장본인이었으니 말이다. 희귀 새 수집가로 유명한 들라쿠르는 노르망디에 있던 그의 영지 샤토 클레르에 사설 동물원을 세우고 긴팔원숭이, 가젤, 캥거루, 플라밍고(홍학), 두루미와 같은 비육식동물을 전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500여 종의 새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작은 새들을 위한 사육장을 짓고, 가장 희귀한 새들을 특별 관리했다. 1922년에서 1930년대 말 동안에는 해마다 특히 열대지방으로 원정을 떠나 살아 있는 표본을 수집하여 다른 수집가들에게 공급해 주었다. 그런 식으로 그가 파리, 런던, 뉴욕으로 보내 준 동물 표본은 조류 3만 마리, 포유동물 8000마리에 달했다. 들라쿠르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동남아시아 및 다른 지역의 조류 편람도 발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던 1939년 노르망디 영지가 불탄 뒤에는 뉴욕으로 이주해 브롱크스 동물원과 미국 자연사박물관에서 근무한 뒤 나중에는 로스앤젤레스 박물관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들라쿠르는 종전 뒤에도 미국에 거주하면서 클레르의 영지와 동물원을 복구하는 데 힘썼고 타계할 때 그 동물원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동물원과 수족관은 이렇게 자연사박물관 및 식물원과 다를 바 없이 초국적 전문 지식의 교류로부터 싹터 국가적・지방적 혹은 개인적 자긍심에 의해 추진되었다.

 

동물원은 농촌과 농업 세계가 도시와 산업 세계로 이행해 가는 것의 일부로 확산되었다. 따라서 그런 변천을 따라잡은 나라들이 당연히 동물원의 확산 속도도 가장 빨랐다. 유럽만 해도 1903년의 가이드북에 벌써 독일 동물원이 열여섯 곳, 영국 동물원이 네 곳, 프랑스 동물원이 네 곳 소개되었을 정도다.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도 동물이 들어섰다. 벵골 과학자 람 브라마 사니알(Ram Brahma Sanyal)이 원장이었던 캘커타의 알리포르 동물원 또한 동물 전시와 연구 면에서 뚜렷한 두각을 나타냈다. 미국에도 유럽의 본보기를 따른 최초의 동물원이 1874년 필라델피아에 건립되었다. 뒤이어 도시 후원자들이 식물원과 동물원을 함께 갖춘 새로운 형태의 공원들을 조성함에 따라 캔자스시티, 볼티모어, 프로비던스, 세인트루이스, 세인트폴 등 다수의 다른 도시에도 동물원이 속속 들어섰다. 1916년에는 남아프리카 프리토리아에도 국립 동물원이 개장했다. 또한 (들라쿠르의 예에서 보듯) 개인 수집관이 동물원이 되고, 동물원 유지도 얼마간 개인 후원금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던 유럽 및 여타 지역과 달리 미국 동물원들은 도시 동물원에서 출발해 공립 동물원으로 발전해 간 특징을 보였다. 세계 박람회도 동물원을 늘려 주는 데 일조했으며 그러다 간혹 박람회의 동물 전시관이 상설 동물원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1931년 파리 식민지 박람회에 설치되었던 이국적 동물 전시관이 뱅센 공원 동물원의 토대가 된 것이 좋은 예다. 20세기 초에는 자연보호의 사명을 드러내려고 한 전문 동물원도 전 세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동물원은 동물을 범세계적 연결성과 지역적 다양성을 동시에 대변하는 것으로 변모시켰다. 카를 하겐베크(Carl Hagenbeck)만 해도 20세기 초 함부르크 외곽에 식물원, 자연사 전시관, 동물 전시관을 하나로 엮어 세계의 다른 지역들을 광범위하게 보여 주고 국제적 영향력이 큰 새로운 형태의 동물원을 조성했다. 하겐베크의 동물원은 관람객 눈에는 도랑과 차폐물이 보이지 않도록 계단식 우리 열을 설치해 동물들이 마치 ‘자연’ 서식지에 뛰노는 것과 같은 아프리카와 북극의 ‘파노라마’를 연출해 보였다. 1907년에 하겐베크 동물원이 이렇게 큰 화제를 일으키며 개장한 뒤로 파노라마와 그 밖의 기술을 이용한 자연경관의 시각적 시뮬레이션은 동물 수집, 그리고 하겐베크도 행했던 인간 전시(Völkerschauen)의 필수 배경막이 되었다.

 

 

과학과 구경거리 사이

동물원들은 또 분류학에 열광했던 그 시대의 추세와 이전 시대의 순회 동물원과 차별화하려는 욕구에도 고취되어 과학 전시관의 지위도 주장했다. 연구도 장려하고 대중에게 생물학 교육과 자연사 교육도 시키려는 취지로 시작되었으나, 실상은 그와 다르게 동물원 전시는 점점 과학의 본질보다는 허울을 보여 주는 데 그쳤다. 에리크 바라테(Éric Baratay)와 엘리자베트 하르두앵퓌지에(Elisabeth Hardouin-Fugier)의 분석서에도 과학적 유용성에 대한 주장이 광범위하게 개진된 것에 비해서는 동물원이 거둔 과학적 성과가 대학 및 박물관 연구소에 비해 훨씬 미흡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동물원들은 과학과 구경거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관람객 유치 면에서 보면 작은 포유동물들은 아무리 정성 들여 전시를 해도 덩치 큰 코끼리 한 마리를 당해 내지 못했다. 도시 거주민들이 서커스, 순회 동물원, 술집과 공립 공원에서 이국적 동물을 구경하는 것에 익숙해 있는 것도 문제였다. 동물원들이 그런 곳과 경쟁하려다 보니 과학 교육과 흥행성 사이에서 접점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파리 아클리마타시옹 공원 책임자 알베르 조프루아 생틸레르(Albert Geoffroy saint-Hilaire)도 19세기 말 조부와 부친이 수행하던 과학적 계획을 계속 추진하려다 파산에 직면한 끝에, 결국 누비안(염소의 일종), 에스키모, 가우초(아르헨티나 카우보이), 그가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릴리퍼트 왕국”으로 명명한 난쟁이촌 같은 민족지적 눈요깃거리들을 전시물에 포함시켰다. 브롱크스 동물원도 1906년 아프리카의 피그미족 인간인 오타 벵가(Ota Benga)를 잠시 전시했다가 동물원 관리자들이 세계 박람회 중앙로에서 한창 인기를 끌던, 살아 있는 인간의 민족지적 전시를 기피함에 따라 중도에 멈췄다. 그래도 어쨌거나 동물원들은 비록 뉴욕의 코니아일랜드와 다른 놀이공원에서 행한 말의 다이빙 쇼와 코끼리 워터 슬라이딩 쇼를 제공하지는 않았지만, 과학과 흥행 사이에서 위험한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1889년에 개원한 미국 국립 동물원마저 ‘과학의 증진’과 ‘국민의 오락’을 건립 목표로 내걸었을 정도다.

 

동물원들은 또 일부분 관람료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흥행이 필요했고, 그래서 도입하여 관람객 유치에 성공한 방법이 익숙한 미니어처 세계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이었다. 모방에는 여러 방식이 동원되었다. 동물 수집물에 서열의 정치를 반영해 수집가와 관람객을 모든 동물, 다시 말해 이국적 동물과 평이한 동물, 거대한 동물과 왜소한 동물, 무시무시한 동물과 겁 많은 동물들의 지배자로 앉혀 놓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생물학적 착오를 일으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보여 주는, 사회적 위계에 대한 잊지 못할 교훈을 깨우쳐 주는 전시였다. 백수의 ‘왕’ 사자가 좋은 예였다. 동물의 감정적인 면을 살린 시뮬레이션도 실시되었다. 동물원을 찾는 사람들은 대개 도시민들이었고, 그러다 보니 동물을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어 동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을 가장 재미있어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우리의 규모도 점점 커졌다. 동물의 행동이 인간의 감정 및 성 역할에 대한 일반적 기준에 부합하게 보이게 하려고 동물들을 ‘가족’으로 수용하려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동물을 사고파는 초국적 네트워크

한편 대형 동물원과 소형 동물원의 폭발적 증가는 ‘이국적’ 동물의 수요 급증을 야기했다.(그 시대의 동물원은 평범한 농장 동물은 전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 그 수요를 맞추기 위해 수에즈 운하와 같은 상업적 인프라의 발전과 식민주의 힘에 주로 의존한, 멀리 떨어진 지역의 동물 교역을 용이하게 해 줄 촘촘한 초국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기업인, 선박 회사, 지역 행정관, 조력자를 찾아 주고 문화 차이에서 오는 각종 오해를 바로잡아 준 지역 거간꾼이 그 네트워크의 일원이었다.

 

동물 거래 면에서는 함부르크가 가장 중요한 교역지 중 하나가 되었다. 생선 장수를 아버지로 둔 하겐베크만 해도 10대 시절에 이미 동물들을 구입해 이동 동물원을 운영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활동 지반을 넓혀 전 세계를 무대로 동물 거래를 하는 중개인이 되었다. 1860년대에는 몇몇 이탈리아 탐험가와 손잡고 코끼리, 기린, 타조, 사자, 하이에나와 같은 아프리카 야생 동물들을 대량으로 들여와 광범위한 인기를 얻고 유명해지기도 했다. 1880년대 중엽에는 그와 그의 가족이 수집하고 공급한 동물이 사자 1000마리, 낙타 300마리, 기린 150마리, 원숭이와 새 수만 마리, 파충류 수천 마리에 달했다. 그런 식으로 하겐베크의 동물 사업은 1907년 개장한 이후 파노라마 배경을 갖춘 ‘자연적’ 전시 모형으로 이름을 날린 하겐베크 동물원과 더불어 순회공연과 민족지적 전시를 포함한 대규모 오락 제국의 일부를 이루었다. 그렇다고 하겐베크가 동물 거래만 한 것은 아니고, 자신의 서커스단과 동물원에도 전시한 ‘진기한’ 인간종들도 공급했다. 뉴욕으로 이주한 독일인 카를 라이헤(Charles Reiche)도 하노버 부근에 그와 유사한 동물 거래 회사를 설립하고, 이집트와 실론에 대리점을 설치한 뒤 미국 시장에 다량의 동물을 공급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는 이런 식으로 독일 동물 상인들이 세계의 야생동물 교역을 주도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독일 동물 교역 네트워크들도 제1차 세계대전 뒤부터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독일이 식민지를 잃고, 선박 회사들 또한 전쟁으로 타격을 입으며, 구제역 발발로 동물 수입과 관련된 입법화가 추진된 것이 요인이었다. 하지만 개인 수집가, 위락 시설, 동물원의 수요는 그것과 관계없이 계속 늘어났다. 새로운 세대의 동물 수집가도 등장하여 미국인 프랭크 벅(Frank Buck)만 해도 동물 수집을 유명인의 이력으로 만들었다. 그는 독일 네트워크들의 쇠락에 편승해 남아시아와 동인도제도에서 동물을 수집하는 것을 평생의 이력으로 쌓았다. 그런 식으로 동물 사냥이 호의적 평판을 얻자 동물원들도 그 일에 직접 뛰어들었다. 미국 국립 동물원장 윌리엄 M. 만(William M. Mann)까지 나서 탕가니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라이베리아로 동물 수집 원정대를 직접 이끌었을 정도다. 그러나 평판과 동물 수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 했던 당초 기대와 달리 윌리엄 만의 원정은 주로 평판을 얻는 데 그쳤다. 그의 부인 일기에는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 갔을 때는 원정대가 “동물 수와 버금갈 정도로 많은 수집가가 그곳 도시들에서 버글거리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도 기록돼 있다.

 

 

 

─ 책임 편집 에밀리 S. 로젠버그┃조행복, 이순호 옮김

『하버드 C.H.베크 세계사: 1870~1945 하나로 연결되는 세계』

1033~1038쪽 중에서

 

 

 

“동물 수와 버금갈 정도로 많은 수집가가 그곳 도시들에서 버글거리는” 광경을 21세기 버전으로도 변주할 수 있겠어요. “콘텐츠 수와 버금갈 정도로 많은 플랫폼이“…….
21세기 최대의 역사 프로젝트 ‘하버드 세계사’의 핵심 단어인 ‘연결’이 동물콘텐츠의 역사에서는 “동물 교역 네트워크”로 펼쳐지네요. 책에서는 이 뒤로 악명 높은 식민지 수탈의 역사가 이어지는데요.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정복하고, 식민지의 동물을 빼내는 일이 ‘자연 보존’이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이처럼 과학과 오락, 연구와 착취는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는 걸 역사에서 확인하게 되는데요. 콘텐츠의 의미와 재미를 둘러싼 막연한 고민이 이래서 풀리기 어렵나 봐요.
‘신의 대리인인 인간’의 관점에서 온 세계 동식물을 분류하고 체계화할 수 있다고 믿은 시기라면, 동물들을 “범세계적 연결성과 지역적 다양성을 동시에 대변하는 것”으로서 전시하고 동물원이라는 공간으로 “과학 전기관의 지위”를 주장하려 한 열기가 대략 짐작 가네요.
이 글을 읽는 저는 동물원 이후의 도심 속 전시장, 크고 작은 과학관과 미술관 같은 장소를 떠올리게 돼요. 사람이 모이고 물건이 모이는 오늘날의 전시콘텐츠는 어떤 연결을 만들고 있을까요? 성급한 판단을 내리기보다 이번 《한편》에 실린 글 「핫플레이스의 온도」에서 발견한 “미지근함” 속에 잠시 몸을 담가 봅니다. (“적어도 핫플은 ‘쿨한’ 플레이스와 대립하지 않은 수평적인 관계로, 미지근한 대기 속에 우리를 있게 한다.”)
20세기 초 동물원의 기세는 좀체로 따라갈 수 없고 그렇게 할 마음도 들지 않지만, 지금 《한편》 편집부에서는 후텁지근한 날씨에 잠깐 정신을 차리기 위한 ‘[한편×탐구] 독자와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콘텐츠’ 호에서 신간 『철학책 독서 모임』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까지, 콘텐츠·책·인문학을 둘러싼 이야기를 두루 나누는 자리를 꾸리려 해요.
‘콘텐츠’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과 뉴스레터와 잡지, 책과 온라인 세미나 등 《한편》이 선보인 다채로운 형식에 대한 감상을 남겨 주시겠어요? 2022년 인문콘텐츠와 편집자, 독자의 네트워크가 한층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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