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애트우드가 SF를 쓰는 이유

 

 

『나는 왜 SF를 쓰는가?』 미리보기!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오늘은 『시녀 이야기』의 작가로 잘 알려진 마거릿 애트우드가 SF라는 세계와 맺어 온 다채로운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몇 년 전 애트우드는 “당신은 SF 작가입니까?”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받습니다. 판타지와 SF 문학의 거장 어슐러 K. 르 귄의 서평을 통해 매우 공개적으로요! 사실 그전까지는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였죠. SF 작가는 무엇이고, 또 SF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이 질문에 대해, 애트우드는 자기 자신을 구체적 사례로 들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데요. 아직 어디에도 공개된 적 없는 따끈따끈한 책, 『나는 왜 SF를 쓰는가』의 서문을 미리 살짝 보내 드릴게요!
“나는 열 살에 작가였던 나를 기억할 수 있고
언젠가 여든 살의 작가가 될 나를 기대하는
쉰세 살의 작가다.”
─ 옥타비아 버틀러
『나는 왜 SF를 쓰는가』는 SF(Science Fiction, 과학소설) 목록을 나열한 카탈로그도, SF에 관한 거창한 이론도, SF를 중점적으로 다룬 문학사도 아니다. 결정적이고, 철저하고, 정통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어떤 지식 체계를 공적으로 대변하는 인물이 내놓은 결과물도 아니다. 이 책은 내가 한 명의 독자이자 작가로서 하나의 혹은 여러 개의 문학 양식이나 그와 관련된 각종 하위 양식과 평생에 걸쳐 맺어온 관계를 탐험한 기록이다.

“평생에 걸친” 관계라고 말한 이유는 내가 어릴 적 처음으로 써낸 작품이 SF라는 약자에 들어맞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든 아이들이라면 으레 그러했듯이, 나 또한 다른 세상을 창조해 내는 발명가였다. 그 무렵에 내가 구상했던 세상은 여러모로 빈약했지만, 지금 이 지구상에 절대 존재하지 않을 법한, SF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보여 준다고 할 만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토성이 더 구미에 맞았고, 머리가 일곱 개 달린 식인 해양 생물이나 기상천외한 다른 왕국들이 마음에 들었다. 

 
첫사랑은 마치 저승에서 찾아온 망령처럼 기존과는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나는 지금까지 (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기쁜 일인데) 그 누구도 사회학적 리얼리즘 소설로 분류하지 않을 만한 장편소설을 세 권 집필했다. 『시녀 이야기』와 『오릭스와 크레이크』, 『홍수의 해』가 바로 그것들이다. 이 소설들은 ‘SF’인가? 심심찮게 그런 질문을 받는다. 물론 질문이 아니라 당신은 어리석은 바보다, 속물이다, 장르를 배반한 작가다 하는 식의 혹평을 들을 때도 있다.  
 

각자가 고수하는 용어나 문학의 세부 분류에 따라 대답은 천차만별이다. 지난 2008년, 나이 차가 꽤 나는 젊은 기자와 ‘SF’를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나는 “SF의 유행이 끝나 가고 있는 걸까요?”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그런데 그 질문을 받은 순간, 나는 그에 대해 어떤 대답도 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SF라는 용어가 최근에는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이 용어는 SF인 것과 아닌 것을 명확하게 구별해 주는, 실제로 어떤 담장으로 구획이 된 울 같은 개념인 걸까? 아니면 서점 직원들이 어느 정도 정확하게, 혹은 적어도 책이 잘 팔릴 수 있는 방식으로 도서를 비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분류상의 개념에 불과한 걸까? 빳빳한 검은색이나 은색 표지에 칠흑처럼 어두운 불길이나 휘황찬란한 행성이 수놓여 있으면 ‘SF’가 되는 건가? 실제 과학에 기반한 요소가 하나라도 들어가 있거나 몸에 딱 달라붙는 의상이 등장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까?
내가 보기에 이런 의문들은 여전히 미결 상태인 것 같았다. 나보다 훨씬 젊었던 그 기자 랜디도 ‘SF’에 대해 어떤 고정불변의 정의를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책을 보면 그 책이 SF인지 아닌지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랜디가 생각하는 SF에는 당연히 우주선, 미치광이 과학자, 처참하게 망해 버린 실험 같은 것이 등장한다. 전기톱 살인마처럼 단순하고 평범한 공포의 대상은 찾아볼 수 없다. 길거리를 걷다가 마주칠 가능성이 전혀 없을 정도는 되어야 SF에 등장할 수 있는 법이다. 랜디는 책 표지에 우주 풍경이 그려져 있는지, 겉싸개는 가죽이나 은박 재질로 되어 있는지 등의 기준에 따라 SF를 분류했는데, 그러고 보면 SF 책 표지는 이러저러할 것이라는 나의 추측도 완전히 엉뚱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내 지인의 아이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우유처럼 생겼고, 우유 맛이 난다면, 그건 100퍼센트 우유예요!” 그러니 SF처럼 생겼고, SF 맛이 난다면, 그건 100퍼센트 SF인 것이다!
그렇지만 책 표지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구소련 시절 이런 일이 있었다. 1989년에 장벽이 무너지기가 무섭게, 한때 두 세계를 나누었던 장벽 사이로 포르노물이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구소련 사람들은 톨스토이 작품을 이미 한 번도 아닌 여러 번씩 읽은 상태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구소련 연방국에서 나의 책 『도둑 신부』가 출간되었다. 아주 좋게 말하면 기만적이고, 아주 나쁘게 말하면 외설적인 난장판을 그대로 옮긴 듯한 표지를 입은 상태로. 그때 커다란 가슴이 드러나는 검정색 새틴 소재 옷차림의 지니아를 보고 구석에서 한 손으로 뜨거운 시간을 보내기를 기대했다가 “또 속은 거야? 에라이!” 저주를 퍼붓고 책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남성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여하간 책 표지와 그 표지가 암시하는 장르 덕분에 독자들을 (본의 아니게) 우롱한 나이지만 다시 그러고 싶지는 않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이야기로 가득한 나만의 작은 가게에서 우주 생명체들이 등장하는 책을 판매하는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우주 생명체는, 어쨌든 간에, 내 어린 시절의 첫사랑이었으니까. 하지만 나에게 우주 생명체를 만들어 낼 능력이 없는 이상 독자들을 거짓말로 꾀어내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해서 남는 것은 결국 실망뿐이니까.

내가 SF 세계 혹은 SF 세계들과 맺어온 관계를 탐구해 보고자 하는 이 욕망에는 사실 직접적인 계기가 있다. 2009년에 또 다른 종류의 ‘다른 세상’을, 어떤 미래에 존재할 행성을 탐구하는 연작 중 두 번째 작품인 『홍수의 해』를 발표한 후, SF와 판타지 문학을 다스리는 군주 어슐러 K. 르 귄이 이에 대한 서평을 썼다. 그 서평의 첫 문단은 몸에 딱 달라붙는 의상과 외계 행성들로 구성된 공동체에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어찌나 격한 논란이었던지 내가 낭독회를 열 때면 질의응답 시간마다 여지없이 누군가가 찾아와 상심한 말투로 묻곤 했다. 어째서 내 자식들을 소금 광산에 팔아넘겨 버리듯이 SF라는 용어를 저버렸느냐고. 논란의 원인이 된 르 귄의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내 생각에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와 『오릭스와 크레이크』, 『홍수의 해』는 전부 현재의 시류와 사건을 두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절반은 예언이고 절반은 풍자인 어떤 머지않은 미래를 추정한다는 점에서 SF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본보기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애트우드는 자신의 그 어떤 작품도 SF라고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자신의 소설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실현 가능하며, 심지어 이미 실현되었을 수도 있고, 그 점에서 “현재 실현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소설”인 SF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애트우드가 SF에 대해 내린 이 제한적인 정의는 자신의 소설이 편협한 독자와 평론가, 문학상 관계자들 사이에서 아직까지 외면받고 있는 장르로 평가절하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장치인 듯하다. 문학 차별주의자들이 자신을 문학계의 게토로 밀어 넣어 버리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내가 내 작품을 SF가 아닌 다른 용어로 부르고자 한 진짜 이유는, 사실 르 귄이 생각했던 이유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SF’는 촉수가 달린 흡혈 화성인들이 금속으로 만들어진 원통을 타고 지구를 침공하는(현실에서 일어날 법하지 않은) 허버트 조지 웰스의 『우주 전쟁』과 동일한 뿌리를 공유하는 작품들이다. 반면 쥘 베른의 소설에서처럼 잠수함이 등장한다든가, 풍선을 타고 여행을 떠난다든가, 오늘날에는 실현될 수 있지만 작가가 그 소설을 쓸 당시에는 온전히 실현되지 않았던 이야기는 내 관점에서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에 해당한다. 그리고 내 작품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다. 화성인이 등장하지 않으니까. 화성인을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단지 화성인이 등장하는 소설을 집필하는 일은 내 역량을 벗어나는 일이어서 그렇다. 
 
그런데 2010년 가을에 성사된 르 귄과의 공개 토론 자리에서 나는 르 귄이 말한 ‘SF’가 (내가 생각하는) ‘사변소설’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비록 르 귄은 나와 달리 현실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SF’가 아닌) ‘판타지’로 분류했지만 말이다. 각자의 의견에 비추어 보면, 르 귄의 관점에서 (또한 내 관점에서도) 드래건이 등장하는 소설은 판타지에 속한다. 정리해 보면 르 귄이 정의하는 ‘SF’는 내 관점에서 ‘사변소설’에 해당하며, 르 귄이 생각하는 ‘판타지’에는 내가 생각하는 ‘SF’의 일부가 포함될 수 있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사실 문학에서 장르의 경계는 점점 더 불분명해지고 있는 데다가, 서로 아무렇지도 않게 이 장르에서 저 장르로 넘나들기도 한다. 
 

용어의 유연성, 문학 장르 간 교환, 장르 간의 왕래 등은 (막연하게 정의된) SF 세계에 오래전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저명한 SF 작가 브루스 스털링은 SF를 단순히 하나의 ‘범주’로 만들어버린 작가와 출판사들을 나무라기도 했다.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은, 아직 ‘범주’는 아니지만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어떤 ‘장르’처럼 보이는 무언가이다. 이는 SF라는 ‘범주’도 아니고, SF라는 ‘장르’도 아니다. 그보다는 합의된 현실에 단호하게 반기를 드는 현대적인 유형의 글쓰기에 가깝다. 이는 판타지스러우며, 때로는 비현실적이고 때로는 사변적이지만, 그렇다고 어느 하나를 철저하게 고수하지는 않는다. 고전적인 과학소설처럼 ‘경이감’을 유발하거나 체계적인 추론을 이끌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하지도 않는다. 대신 독자에게 굉장히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유형의 글이다. 어느 정도의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면 20세기 후반이라는 시기를 살아가는 도중 생경한 감정을 느끼게 될 것처럼 말이다.”
스털링은 이러한 소설을 ‘슬립스트림’이라는 이름으로 묶기를 제안했는데, 이 목록은 케이시 애커, 마틴 에이미스, 살만 루슈디, 주제 사라마구, 커트 보니것 등 대체로 ‘진지한’ 작가로 간주되는 이들을 비롯해 무척이나 다양한 작가의 광범위한 작품을 포괄한다. 그런 작품들이 갖는 공통점은 소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실제로는 일어났을 법하지 않다는 것이다.
앞선 시대에 ‘슬립스트림’이라고 간주할 만한 작품들, 예를 들어 헤로도토스가 들려주는 외발 인간과 대형 개미에 대한 이야기나 유니콘과 드래건, 인어에 관한 중세 전설 등은 전부 ‘나그네의 허풍’이라는 표제 아래 묶였을지도 모른다. 그 후에는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처럼 기막히고 기괴한 이야기로 구성된 선집으로 묶였을 테고, 그보다 더 시간이 지난 후에는 M. R. 제임스나 H. P. 러브크래프트, R. L. 스티븐슨의 작품에 있을 법한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이야기’로 분류됐을 것이다.
그러나 틀림없이 이 모든 이야기는 전부 같은 우물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것들이다. 우리의 일상 세계와 분리된, 상상 속의 다른 세상 말이다. 영적 세계로 향하는 문을 통과하거나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을 나누는 문턱을 넘어서서 다른 시간, 다른 차원을 상상한 결과물. SF, 사변소설, 검과 마법의 판타지, 슬립스트림 소설. 이 모든 이야기는 ‘놀라운 이야기’라는 커다란 하나의 우산 아래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SF를 읽고, SF를 쓰고, SF와 관계를 맺는 행위, 더욱 거친 창조의 바다에 더욱 거칠게 휘몰아친 그 폭풍들은 전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걸까? 사람들이 작가에게 궁금해하는 점도 바로 이런 부분이다. 무엇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어떤 계기로 글을 쓰기 시작하신 건가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그냥 어쩌다 보니 하게 됐어요.” 라든가 “무엇에 사로잡혔던 건지는 모르겠네요.”라는 식의 설명에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구체적인 계기를 듣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지금 한번 말해 보려 한다.
어린아이였던 1944~1945년 겨울 수생마리 지역에 위치한 오래된 저택에 잠시 머무는 동안, 나는 아침이면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는 한기가 감돌지만 널찍한 다락방에 올라가 어린아이 특유의 자기중심적인 희열에 찬 상태로 팅커토이 막대기와 실뭉치를 이용해 이상한 집과 사람 비스름한 것을 만들곤 했다. 그때 정말 만들고 싶었던 것은 장난감 상자에 그려져 있던 풍차였지만 내가 가진 팅커토이 세트에는 풍차를 만드는 데 필요한 부품들이 없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만큼 그 부품들을 얻게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어떤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 하는 예술은 어린 시절에 갖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갈망을 채워준다고 말한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그 어린 시절에 풍차를 만들 수 있었다 해도 지금처럼 작가가 되었을까? 지금처럼 SF를 쓰는 작가가 되었을까? 그 누구도 정답을 알 수는 없는 질문이지만, 생각을 해 볼 수는 있다. 세월이 흘러 이제 내 앞에는 (심하게 변형된 형태의) 풍차가 놓여 있다. 내가 이 풍차 덕분에 느낄 수 있었던 즐거움을 부디 독자분들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란다.
─ 마거릿 애트우드, 『나는 왜 SF를 쓰는가』(근간)의 서문에서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 책의 헌사에 “어슐러 K. 르 귄에게”라고 밝히며, SF와 자신의 관계를 탐구한 이 여정이 동료 작가와의 대화에서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했답니다. 이 모든 대화의 시작이었던 판타지, SF문학의 거장 르 귄은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 등 뛰어난 장르 문학을 많이 남겼는데, 한국에 최근 번역된 에세이집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는 보다 일상적이고 유머러스한 작가의 면모를 볼 수 있어 즐겁습니다. 

‘애트우드’하면 자연스레 ‘SF’가 떠오르는데 애트우드가 그 이름을 거부했다니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출간될 책도 기대가 되네요 현실과는 다른 세상이 마치 현실인 것처럼 펼쳐진 세계를 어리둥절한 채로 따라가는 환상적인 경험! SF처럼 생겼고, SF 맛이 나는 이야기들을 읽는 이유는 이런 게 아닐까요? 

어린 시절의 애트우드 이야기를 들으니까 추석 때 만난 조카가 떠올라요. 조카가 귀여워하는 곰돌이 인형 별이에게 옷을 만들어주기로 했는데(원래 입고 있던 검은색 해녀 옷을 벗긴 까닭에 이름이 검정이에서 별이로 바뀜), 제가 안 입는 낡은 옷 중에 뭘 자를지 생각하는 동안 조카가 그러는 거예요. “차 타고 오면서 별이가 노란색 옷을 입고 있는 상상을 했어.” 상상이라는 말이 문득 가슴으로 들어오더라구요. “그러나 생각들은 또한 사라졌네”라고 말하는 에밀리 브론테의 시집 『상상력에게』도 펼쳐보고 싶네요.

1939 11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태어나 온타리오와 퀘벡에서 자랐다
. 곤충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매년 봄이면 북쪽 황야로 갔다가
가을에는 다시 도시로 돌아오곤 했다
. 어울릴 친구가 별로 없었던 애트우드에게는 독서가 유일한 놀이였다. 토론토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스물한 살에
첫 시집 『서클 게임』을 출간했으며
, 이 시집으로 캐나다 총리 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성의 사회 활동과 결혼 등에 대한 소재로 1969년 첫 장편
소설을 발표하였고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 대표작으로 『시녀 이야기』, 『고양이 눈』, 『도둑 신부』, 『그레이스』, 『오릭스와 크레이크』, 『홍수의 해』, 『미친 아담』 등이 있으며, 2000년 발표한 『눈먼 암살자』로
부커 상을 수상했다
. 장르를 넘나드는 이야기꾼이자 날카로운 관점으로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폭로하는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 여러 유수의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쳤고, 국제사면위원회, 캐나다 작가협회, 민권운동연합회 등에서 활동 중이다. 아서 클라크 상, 미국 PEN 협회
평생 공로상
, 독일도서전 평화상, 프란츠 카프카 상 등을
수상했고
, 2019년 『증언들』로 또 한 번 부커 상을 수상하였다. 매년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민음사
1p@minumsa.com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1길 62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02-515-200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