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금년에 처음으로 참가헌 여자 대원 중에서 제일 좋은 성적을 나타낸 ××여자신학교에 재학중인 채영신 양의 감상담이 있겠습니다.”
하고 회장은 오른편에 여자들이 모여 앉은 데를 바라다본다. 남학생들은 그편으로 머리를 돌리며 손뼉을 친다.
‘채영신’이라고 불린 여자는 한참 만에 얼굴이 딸깃빛이 되어 가지고 일어나더니,
“전 아무 말두 허기 싫습니다!”
하고 머리를 내저으며 여무지게 한마디를 하고는 펄썩 주저앉아 버린다. 사회자는 어쩐 영문인지 몰라서 눈이 둥그래졌다. 뜻밖에 미리 약속까지 하였던 연사가 말하기를 딱 거절하는 데는, 사회자와 청중이 함께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를 말헙시다.”
“그 대신 독창이래두 시키세.”
상대자가 여자인 까닭에 더욱 호기심을 가진 남학생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음악회에서 억지로 끌어내어 재청이나 시키는 것처럼 짓궂게 박수를 하며 야단들이다.
“간단하게나마 말씀해 주시지요.”
사회자는 좀 무색한 듯이 채영신이가 앉은 편으로 몇 걸음 다가오며 어서 일어나기를 권한다.
그래도 영신은 꼼짝도 아니 하고 앉았다가 곁에서 동무들이 옆구리를 찌르고 등을 떠다밀어서 마지못해 일어났다. 서울 여자들은 잠자리 날개처럼 속살이 하얗게 내비치는 깨끼 적삼에 무늬가 혼란한 조세트나, 근래에 유행하는 수박색 코로나프레프 같은 박래품으로 치마를 정강 마루까지 추켜 입고 다닐 때건만, 그는 언뜻 보기에도 수수한 굵다란 광당포 적삼에 검정 해동저 치마를 입었고, 화장품과는 인연이 없는 듯, 시골서 물동이를 이고 다니는 과년한 처녀를 붙들어다 세워 놓은 것 같다. 그러나 얼굴에 두드러진 특징은 없어도, 청중을 둘러보는 두 눈동자는 인텔리 여성다운 이지가 샛별처럼 빛난다. 그는 사회자를 쏘아보며,
“첫째, 이런 자리에까지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지는 모르지만, 남이 다 말을 허구 난 맨 끄트머리에 언권을 주는 것이 몹시 불쾌합니다.”
새되고 결곡한 목소리다.
“흥, 왼간헌걸.”
“여간내기가 아닌데.”
남학생들은 혀를 내두르며 수군거린다. 제자리에 돌아와 이제껏 흥분을 가라앉히느라고 눈을 딱 감고 있던 동혁이도, 얼굴을 쳐들고 채영신의 편을 주목한다.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영신은 말을 이어,
“둘째는 제 속에 있는 말씀을 솔직허게 쏟아 놓구는 싶어두요, 사회허시는 분이 또 무어라고 제재를 허실 테니깐, 구차스레 그런 속박을 받어 가면서까지 말을 헐 필요가 없을 줄 압니다.”
하고 다시 앉아 버린다. 이번에는 여자석에서 손뼉치는 소리가 생철 지붕에 소낙비 쏟아지듯 한다.
사회자는 그만 무안에 취해서 얼굴을 붉히며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아까 박동혁 군이 말헐 때는, 시간이 없다고 주의를 시킨 것이지 말의 내용을 간섭헌 것은 아닙니다.”
하고 뿌옇게 발뺌을 한다. 그러자 동혁이가 벌떡 일어나 나치스식으로 팔을 들며,
“사회!”
하고 회장이 찌렁찌렁하도록 부른다.
“밤을 새우는 한이 있드래두 이런 기회에 우리는 충분히 의견을 교환허고 싶습니다. 위선 지도원리를 통일해 놓고 나서 깃발을 드는 것이 일의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톡톡히 항의를 한다. 사회자는 시계를 꺼내 보고 사교적 웃음을 띄우며,
“채영신 씨, 그럼 내년에는 맨 먼첨 언권을 드릴 테니 그렇게 고집허지 마시고 말씀허시지요.”
하고는 장내의 공기를 완화시키려고 슬쩍 농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