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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을 처음 알게 된 건 2005년이다. 물론 서로 안 것은 아니고 나 혼자만 알았다. 시집 『별 모양의 얼룩』은 그야말로 얼룩처럼, 그것도 별 모양의 얼룩처럼 기억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이후 숱한 시집을 읽고, 느끼고, 감동하며 감격했으나, 누구도 김이듬 만큼의 얼룩은 남기진 못한 것 같다. 가령 아래와 같은 구절들.

순진한 적 없는 나는 아버지를 도왔습니다/ 공장장 아저씨가 나를 발이 닿지 않는 선반에 올려 두고 외출증을 끊어 갑니다 치마에 피가 묻었습니다/ 플라스틱은 녹아 흐르고 쇳덩이들이 뜨거워졌습니다/ 처음으로 공장집이 따뜻해지자 사라졌습니다

 

-「청춘이라는 폐허 2」부분, 『별 모양의 얼룩』, 천년의시작

김이듬의 시를 읽으면 일순간 최대한으로 긴장하게 된다. 무슨 일이 있을지 끔찍해서 알고 싶지만, 대체 무슨 일일까 끔찍하게 궁금하도록 만드는…… 그렇다면, 이것은 공포영화인가? 어느 정도는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낫겠다. 김이듬의 시는 공포영화가 아니라, 공포영화를 보며 놀라고 안도하길 반복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이러한 반복을 멈출 수가 없는, 불가피한 욕망들.

이번 시집에서 김이듬은 공포와 욕망, 육체와 감각 같은 얼룩에 유머라는 얼룩을 추가한다. 사람들이 김이듬에게서 쉽게 기대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나는 김이듬의 유머를 기다려 왔다. 그리고 이번 시집 『표류하는 흑발』에서 김이듬의 유머는 여유롭게 폭발한다. 여전히 다음 행에 대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무엇이 나올지 모르겠는 공포를 주면서도 그 사이사이 유머는 스미어 있다. 가령 아래와 같은 시.

밤을 향해 가고 있었다 길고 좁고 어두운 길에 사람이 엉켜 있었다 포옹인지 클린치인지 알 수 없었다 둘러 갈 길 없었다 나는 이어폰 빼고 발소리를 죽였다 팔꿈치를 벽에 대고 한 사람이 울기 시작했다 야 너무하잖아 지나는 사람 붙잡고 물어보자 누구 말이 맞는지 가려보자며 다른 사람이 소리쳤다 멈칫 둘러보니 행인이라곤 나밖에 없었다 난 긴장하며 고개 숙여 기다렸다 이 순간 내가 저들의 생에 중대한 판단을 내려야 하나 보다 원투 스트레이트 촌각의 글러브가 심장을 쳤다 가로등 밑에서 편지를 읽던 밤이 떠올랐다 달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렇게 씌어 있던 우린 이어지지 않았다 그 젊은 연인들은 나한테 접근하다가 둘의 그림자만 거죽처럼 흘리고 갔다 얘들아 나도 불가피하게 사람인데 너무한 거 아니니 그들이 사라져 간 골목 끝에서 나는 신보다 고독했다

 

-「밤의 거리에서 혼자」, 『표류하는 흑발』, 민음사

이 시를 읽고 나 혼자 유행어를 만들어서 되든 안 되든 밀어붙이고 있다. “얘들아 나도 불가피하게 사람인데 너무한 거 아니니?” “나도 불가피하게 사람인데 너무하잖니.” “나도 불가피하게 사람인데……” 불가피하게 사람인 우리는 공포스럽고 혐오스러운 세상에서 불가피하게 사람으로 산다. 어쩌다 웃으면서 거의 울면서. 『표류하는 흑발』은 이런 우리에게 불가피한 필독 시집이 될 만하다. 이런 시가 없다면 우리는, 삶을 삶답게 살 수 없을 것이다. 신보다 고독할 것이다.

민음사 편집부 서효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