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의 운동화』 부서지고 사라지고 잃어버린 것들을 되살리고 기억하려는 마음

김숨 장편소설 『L의 운동화』는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청년 이한열의 운동화가 복원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최루탄에 맞을 당시 이한열이 신었던 흰색 운동화는 왼쪽은 잃어버리고 오른쪽 한 짝만 남았습니다. 주인은 잃고 홀로 남은 운동화는, 세월이 흐르면서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2015년 그의 28주기를 맞아 미술품 복원 전문가인 김겸 박사가 복원하여 현재 이한열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사람도, 물건도, 시간이 흐르면 소멸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부서지고 사라진 것들을 어떻게든 되살리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복원가들입니다.‘복원’이란 무엇일까요?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본디 모습 그대로 되살리는 것입니다. ‘복원’과 ‘훼손’은 종이 한 장 차이이며, “원작의 상태를 벗어나지 않는 ‘적정한 선’에서 작업을 멈추는 것은 복원가의 역량이자 덕목”이라고 말합니다. 소설 속에는 많은 예술 작품들이 언급되며, 실제 미술품 복원 사례들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마크퀸_셀프

 마크 퀸, 「셀프(self)」, 1991년.
“마크 퀸은 자화상들을 자신의 피로 만들었다. 그는 5년 동안 꾸준히 피를 뽑아 인간의 총 혈액량인 4.5리터가 모아지면 그것으로 자화상 「셀프(Self)」를 제작했다. 자신의 두상을 모형으로 한 석고 거푸집에 피를 부은 뒤 응고시켜 완성한 그 작품들은, 영하 9도 내외의 특수 냉동고 안에서만 형태 유지가 가능한 운명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1996년 제작한 두 번째 「셀프」는 영국의 유명한 수집가 찰스 사치가 소장했는데, 청소부가 그만 실수로 냉동고의 전원 코드를 뽑는 바람에 피가 녹아내려 훼손되었다.(그 작품은 녹았다가 응고된 흔적들을 아물지 않은 흉터처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작품은 어이없는 실수로 인한 훼손을 통해 작가가 의도한 주제인 생명의 나약함과 유한성을 확실히 증명해 보였다. 연작인 자화상들이 렘브란트의 자화상처럼 자신의 ‘삶’으로부터 오는 것이기를 바란다고, 그는 말했다던가.(중략) 마크 퀸이 죽은 뒤 저 작품이 망실(亡失)될 경우, 저것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피는 살아 있는 몸속에서 생성되고 순환하는 오묘한 재료였다. 온도에 따라 변질, 소실되기 쉬운 피를 다급히 수혈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 ‘피’라는 물질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냥 피가 아니라, 마크 퀸의 피를. 만약 30대 초반에 모은 피로 제작한 「셀프」일 경우 그 당시의 피를 대체할 물질을. 다른 사람의 피가 섞여도 그것을 여전히 그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11~12쪽)

 

 

 

요셉보이스_죽은토끼

요셉 보이스,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법」, 1965.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법」이 손상되었을 경우 그것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필름에 기록된 영상이 아니라, 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설치 작품이라는 가정 아래. 속삭임은 물질이 아니라 비물질이다. 실재하지 않는 데다 구체적인 형상을 띠지 않는 비물질은 인간의 의식과 오감을 자극한다. 속삭임을 구성하는 것은 언어와 목소리다. 그렇다면 목소리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음색, 음정, 음조, 그리고 그것을 내는 사람의 심리와 기질과 성품……. 더구나 보이스의 속삭임은, 죽은 토끼만이 해독 가능한 주술적인 속삭임이다. 보이스라는 인간은 죽고 없다. 그의 목소리 역시 죽음과 함께 소멸하고 없다. 비물질은 현대 미술의 중요한 재료로 자리 잡았다. 영상, 소리, 침묵, 빛, 어둠, 바람, 냄새, 감촉, 움직임 등 비물질적 재료들을 기록하고 재현하는 작업은 복원가들에게 당면한 숙제와 같다. L의 운동화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물질이다.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자면 폴리에스터우레탄, PVA, 나일론 등이다. 그런데 나는 폴리에스터우레탄이라는 물질적 요소보다, 비물질적인 요소가 L의 운동화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화학적으로, 물리적으로 분석이 불가능한 그 어떤 고유하고 특정한 요소가. 예를 들자면 보이스의 속삭임 같은 요소가.”(34~35쪽)

 

 

렘브란트_야경

렘브란트, 「야경」, 1642년.

“복원 역사에 있어서, 렘브란트의 「야경」만큼 수난을 겪은 작품은 없을 것입니다. 흔히 예수의 수난에 비교할 정도니까요. 1642년 작인 그 작품이 처음 복원된 것은 18세기입니다. 아직 복원 기술이 미숙한 시기로, 먼지를 제거하지 않고 바니시를 새로 칠한 탓에 명암이 원작보다 어두워졌습니다. 1975년에 「야경」은 예기치 않은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정신 질환을 앓던 사내가 빵을 자르는 칼로 「야경」을 난도질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복원 전문가의 바느질 봉합 작업으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야경」은 1990년에, 염산 테러라는 또 한 번의 황당한 수난을 당합니다. 다행히 신속한 응급조치 덕분에 큰 피해는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응급조치라는 것이 물을 뿌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응급조치 덕분에 그림의 겉면인 바니시 층만 손상을 입었습니다.”(38~39쪽)

 

 

다빈치_최후의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1495~1497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속 유다의 얼굴은 수차례 복원을 거치는 동안 작가가 의도했던 것보다 사악하게 개조되었다는 설이 있다. 복원의 개념이 불분명하던 시기에는 화가들이 복원 작업을 했고, 어떤 화가는 심지어 자신의 사인을 버젓이 써넣기도 했다. 1497년에 완성된 「최후의 만찬」은 20년 만에 페인트가 벗겨지기 시작해 복원에 복원을 거듭했다. 1726년 고용된 화가 미켈란젤로 벨로티는 작품 전체를 새로 색칠한 후, 무려 일곱 차례나 복원 작업을 실시했다. 그의 복원 작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 고용한 화가는 외과 수술용 칼로 벨로티가 칠한 것을 벗겨 냈다. 가장 근래의 복원 작업은 복원 전문가인 피닌브라빌라 바르칠론 박사가 진행했는데, 그는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3년 동안 「최후의 만찬」을 관찰하고, 현미경을 이용해 40배로 확대 조사했다. 그는 가장 먼저 500년 동안 켜켜이 낀 때와 이전의 복원 흔적을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특수 제조한 용제를 그림에 바른 뒤, 그 용제가 애초의 다빈치가 칠한 물감에까지 도달하기 전에 재빨리 닦아 냈다. 그 작업을 수차례 반복하자 마침내 다빈치가 사용한 밝은 색채가 살아났다. 흐릿해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던 사물들이 선명해지면서 백랍 접시에 반사된 레몬 조각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이전의 복원 작업들이 다빈치의 원작과 아주 다르게 진행되었고, 상당 부분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물감으로 채워 넣어야 했다고 말했다.”(94~95쪽)

 

 

스포에리_헝가리식식사

다니엘 스포에리, 「헝가리식 식사」, 1963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작품의 제목은 유명한 「헝가리식 식사」로, 평론가 장 자크 레베크가 1963년 3월 9일에 한 식사의 기록입니다. ……식사가 끝나고 남은 음식들과 접시, 술잔 등이 널려 있는 식탁의 풍경은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덫으로 잡듯이 포착해 보여 줍니다. 누군가는 어떻게 저런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느냐고 따지겠지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연한 것들, 계획에도 없던 것들, 지나가는 것들, 지나가지만 일상에서 반복되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결정짓고는 합니다. ‘덫에 걸린 그림들’을 통해 스포에리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요. 일회적으로 소비되는 가치를 영원으로 고정시켜 보여 줌으로써 근원적인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요.” 불현듯 ‘덫에 걸린 그림들’의 작업 의도와 과정이, L의 운동화를 복원하고 보존 처리하는 과정과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포착’한다는 의미에서, ‘고정’시킨다는 의미에서.(229쪽)

 

 

 

복원전2 복원전1

이한열의 부서진 운동화

 

그렇다면, ‘L의 운동화’의 ‘본디 모습’은 무엇일까요? 공장에서 이제 막 생산되어 나온 직후일까요? L이 운동화를 사서 처음 신은 때일까요? 최루탄을 맞을 당시일까요? 작품 속 화자인 복원가는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동안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L의 운동화를 최대한 복원할 것인가? 최소한의 보존 처리만 할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둘 것인가? 레플리카를 만들 것인가?

“내가 복원해야 하는 것은, 28년 전 L의 운동화가 아니다. L이 죽고, 28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버틴 L의 운동화다. 1987년 6월의 L의 운동화가 아니라, 2015년 6월의 L의 운동화인 것이다. 28년 전 L의 발에 신겨 있던 운동화를 되살리는 동시에, 28년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100~101쪽)

 

 

복원 후 좌측면 복원 후 우측면

이한열의 복원된 운동화

실제로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한 김겸 복원가는 “나는 다만 이한열이 살아 있을 때 그의 집 현관에 놓여 있을 법한 운동화로 돌려놓고 싶었다.”라고 말합니다. 자, 그의 운동화가 당신 손에 놓여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복원하실 건가요? 부서져 버린 것, 사라져 버린 것, 잃어버린 것, 당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그 어떤 것을 되돌릴 수 있다면, 되살릴 수 있다면.

 

편집부 김소연 

김숨
연령 13세 이상 | 출간일 2016년 5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