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 비평은 문학을 몰고 올 수 있을까

길지 않은 한국문학 편집자 생활 중, 지금이 최대 위기인 것 같다. 물론 밀물과 썰물처럼 위기와 더 큰 위기는 반복해서 찾아오겠지만, 지금처럼 난데없는 허망함의 파도는 당분간 없을 것이다. 표절로부터 시작된 최근의 논란은 비난과 비판, 사과와 회피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사이, “비평의 역할”로 담화가 확대되고 있다.

시집 『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시작이 쉽지 않아 최근의 섭섭함을 토로해 본다. 지금 크나큰 비난을 받고 있는 작가는 한때 평단과 독자 모두에게 신뢰와 사랑을 받던 ‘국민 작가’였다. 독자들이 그간 있어 온 표절을 눈감고 봐 주며 그 자리에 오른 게 아니다.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주류 비평의 옹호를 받으며 작가는 성장했고, 결국 지금에 이르렀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 비평이 문제다. 비평이 위기다. 지금 비평은 부도가 났다.

근래 비평의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게 시집이나 소설책 뒤에 붙는 <해설>이다. 독자에게는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고, 해당 작품의 문학적 의의를 따져 묻는 것이 해설의 기본적 역할이다. 『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의 해설은 김수이 문학평론가가 맡아 써 주었다. 시집 원고를 처음 봤을 때, 난해하고 철학적인 의문형 제목에 이질감이 들었다. 이 질문의 문장이 시집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보였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몇 차례 기계적인 교정을 하고 있는 차에 해설 원고가 입수되었다. 해설의 제목은 「질문만이 존재의 가능하고 유일한 화법?」. 아니, 또 의문형이라니.

해설은 질문을 가장한 소제목 셋으로 구성되었다. 1)언어-존재를 불러올 수 있는가. 2)그 언어-존재와 나의 언어 존재는 만날 수 있는가. 3)그 언어-존재와 함께 나의 언어-존재는 자신과 세상에 변화를 줄 수 있는가. 심언주 시인은 ‘부’를 나누지 않고 시의 순서에만 의지해 시집을 구성했다. 이는 상당한 모험인데, 50편의 시가 각기 알맞은 방에 있을 때 독자가 그 집의 구조를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언주 시인은 이를 직관적으로 포기하고 독자에게 시의 인테리어를 일임했다. 시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냉장고가 들어설 자리에 TV를, 침대가 들어갈 자리에 식탁을 놓을 수도 있다.

이런 독자를 위한 가이드가 김수이의 해설이다. 김수이의 글은 심언주의 시를 상찬하지 않는다. 문학사적 어느 위치에 함부로 시집을 갖다 놓지도 않는다. 다만, 시의 이해와 감상을 돕는다. 시에 대한 평은 객관적이고 건조한 문장 뒤에 숨는다. 가령 마지막 문장 “그렇다면 지금, ‘당신’과 나의 질문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뒤로 말이다. 시와 시집이 훌륭하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위와 같은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시집은 이미 성공한 시집이다. 김수이는 시집이 만드는 질문의 아우라를 좀 더 구체적으로 조각한다. 그 조각을 비평의 묘수, 비평의 귀환, 비평의 흥행이라고 해도 될까.

곧 장마철이다. 혼탁함으로 가득한 한국문학의 대기 위로 한바탕 비가 쏟아지려나 보다. 빗속에서, 비평은 문학을 몰고 올 수 있을까? 시집 『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에 약간의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민음사 편집부 서효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