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왼), 『한국이 싫어서』(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한국이 싫어서』

 

젊은이들의 新행복론. 말하자면 그런 책이 1년 간극으로 출간되었다. 한 권은 일본의 젊은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민음사, 2014)이고 다른 한 권은 한국의 기자 출신 젊은 소설가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다. 하나는 무한히 긍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다른 하나는 꼭 그만큼의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 제목만 보면 그렇다는 거다. 실상은 앞선 것이 뒤에 오는 것보다 깊은 절망을 담고 있는데, 중요한 건 둘 사이에 두드러지는 공통점이다. 두 권의 책 모두  ‘작은 행복’을 추구한다.

작은 결혼식도 아니고 작은 행복은 뭘까. 소박한 행복? 나만의 행복? 자신에게 의미 없는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걸로 인생을 허비하는 태도를 부정하는 개념이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에 나오는 핵심어 ‘사토리 세대’를 나는 득도 세대로 이해한다. 그들은 자신만의 행복에 대해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절망에 포획되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달았는데, 안쓰럽게도 그건 일종의 처세술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작은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불가피한 수단 같기 때문이다. 사토리 세대에 혁명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도 그래서가 아닐까.

사토리 세대가 방법, 수단의 하나로 작은 행복을 추구한다면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는 소박한 행복이 그 자체로 목적이다. 따라서 계나를 국외자로 내모는 것도 계나 자신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겠지만.) 여기서 사는 것보다 저기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다는 자신의 판단. 단순하고 이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복잡할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희생과 노력들이 동반되기는 마찬가지인 외국에서의 삶을, 어찌 됐든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온힘으로 내린 용기 있는 판단. 그리고 행동. 계나의 판단과 행동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충분히 논쟁적이며 다양한 각도로 주목할 만한 이 이야기를 말이다.

다르면서 비슷한 한국과 일본의 新행복론은 1인 1행복 시대를 겨냥하는 듯하다. 이제 정말 자신만의 행복론을 갖지 못하면 이유도 모른 채,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천 길 낭떠러지로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 우리 발밑에 상시 대기 중인 낭떠러지에 반감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행복을 생각하기에 앞서 두 권의 책을 읽어 보면 좋겠다. 책은 먼저 고민한 사람들이 남긴 참고서이기도 하니까.

민음사 편집부 박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