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원』, 강신주가 소설 쓰기를 포기한 까닭은?

“20년 전 대학원 시절부터 소망했던 나의 꿈, 언젠가 원효에 대한 근사한 소설을 쓰리라는 꿈을 이제 나는 접을 것이다. 이건 모두 김선우의 소설 『발원』 때문이다. 나는 그냥 『발원』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나는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때로는 손에 땀을 쥐게, 때로는 안타까움에 탄식하게, 때로는 섹시한 떨림을 주며, 때로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정말로 근사하게 『발원』은 우리 마음에 수많은 색깔의 파문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일까, 『발원』을 읽은 뒤 나는 그만 김선우 작가에게 설복당하고 말았다.”

소설가로 데뷔할 기회를 박탈당한 철학자 강신주의 행복한 넋두리다. 강신주는 김선우 작가의 장편소설 『발원』 뒤에 왜 자신이 소설 쓰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단편소설 한 편 분량이 훌쩍 넘는 50페이지에 걸쳐, 그야말로 ‘소설’을 썼다.

지난겨울 강신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엄청난 소설이 있어요. 이건 꼭 책으로 내야만 합니다.”

강신주가 소설을? 철학, 영화, 시, 미술, 음악 등 손을 뻗치지 않는 분야가 없을 만큼 아무리 팔방미인이라지만, 이제 소설까지? 당장 만났다. 김선우 작가와 함께였다. 내민 원고에 ‘세 개의 달’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3년 전 《불교신문》에 연재되었던, 당시 내가 읽자마자 단숨에 반했던, 바로 그 소설이었다.

강신주는 마치 자신의 소설인 양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이어갔고, 그 옆에서 정작 이 소설을 쓴 김선우 작가는 온화한 대자대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당장 읽기 시작했다. 연재 당시에도 읽는 이를 순식간에 몰입시키는 작품이었는데, 3년 동안 완전히 새로운 소설로 다시 태어나 있었다. 시인 특유의 시적인 문체와 드라마틱한 이야기 전개, 매력적인 인물 묘사, 영화적 상상력이 한결 더해져, 원효와 요석의 목소리를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주며, 1400년 전 신라의 서라벌을 눈앞에 온전히 펼쳐 놓았다.

편집자 생활 꼬박 10년 만에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은 책은 처음이었다. 봄과 함께 시작되어 봄이 끝날 무렵 마무리가 된 편집 과정은 한 편의 소설을 방불케 할 만큼 파란만장했다.

애초에 이 책에는 요석과 원효가 살아 숨 쉬는 듯, 서라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줄 삽화를 넣기로 했다. 그런데 출간을 앞두고 갑작스레 펑크가 났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강신주 선생이 탁월한 아이디어를 주었다. 원효와 의상의 행업을 그린 『화엄연기』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실린 그림을 쓰자는 것이다. 일본 승려 묘에가 13세기에 만든 두루마리 그림으로, 일본의 국보이기도 한 이 책은 그러나 국내에서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일본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화엄연기』 전문가 김임중 선생께 도록을 구해 주십사 부탁을 드렸다. 생면부지 편집자의 부탁에 흔쾌히 일본 고서점에서 도록을 구입해 한국으로 발송해 주었다. 그런데 설상가상, 5월 초였던 그때가 마침 일본 골든위크에 걸려, 출간 일정에 맞춰 도록을 배송받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국립중앙박물관 도서관에서 『화엄연기』를 소장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 당장 달려갔으나, 대출이 불가하다는 또 한 번의 좌절. 급히 사진작가를 섭외하여 복사 촬영을 했다. 그런데 막상 책에 앉히고 보니, 『화엄연기』 상당 부분이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떠난 이후의 이야기라, 원효의 삶 전체를 그린 『발원』에 딱 맞는 옷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부랴부랴 대책 회의 끝에, 처음부터 표지 이미지로 염두에 두었던, 김영옥 화백의 만다라 그림을 넣기로 했다. 작은 돌 도장에 그림을 새겨서 그걸 찍은 후, 그 위에 채색을 하는 독특한 작업 방식으로 유명한 작품인데, 세상의 조화로운 행복을 염원하는 화쟁의 의미를 담은 만다라 그림과 원효의 삶을 그린 『발원』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러나 엄청난 스케일의 그림을 작은 소설 판형 속에 삽화로 조각조각 보여 주려니 역시 잘 어우러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디자이너가 아이디어를 냈다. 일반적으로 표지는 적게는 서너 번, 많게는 수십 번의 시안을 거쳐 탄생하게 마련인데, 『발원』 표지는 단 한 번에 통과될 만큼 모든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표지였다. 1권에 발(發), 2권에 원(願) 자를 디자이너가 탁월한 솜씨로 직접 써 넣었다. 디자이너가 삽화 대신 불경을 한자로 적어 넣으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주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참선을 하듯 불경을 써 나가던 중 마감일을 며칠 앞두고, 쌍둥이 예비 아빠였던 디자이너의 아내가 7개월 만에 조산을 하게 되었다. 부랴부랴 미술부 다른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아 마무리하여 무사히 출간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디자이너의 쌍둥이가 건강하기를 발원한다.

책 맨 앞에 실린 ‘신라 왕경도’로 말할 것 같으면, 거기에도 버금가는 사연이 있다.

『발원』의 시대적 배경은 7세기 신라 서라벌이다. 서라벌은 8세기 경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과 함께 전 세계 4대 도시로 꼽힐 만큼, 현재 경주의 10배 규모가 넘는 거대한 계획도시였다. 독자들에게 천년 고도의 위용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서라벌을 생생하게 보여 줄 지도를 넣기로 했으나, 문제는 신라 시대는 지도가 없기 때문에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것. 치밀한 고증을 통해 작업하기로 유명한 역사소설가 김탁환 작가의 도움으로, 카이스트 서라벌 3D 복원 팀에게서 관련 논문과 각종 영상 자료들을 받고, 신라 왕경 연구계의 권위자인 박방룡 선생께도 도움을 받았다. 이를 토대로 디자이너가 그려도 보고, 급기야 김선우 작가가 직접 그려 보는 등, 여러모로 작업을 시도했으나, 서라벌의 규모를 보여 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또다시 수소문 끝에, 당시 서라벌을 가장 생생하게 재현한 그림으로 손꼽히는 이재건 화백의 「신라 왕경도」를 찾아냈다.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신라역사과학관에 자료 제공을 요청했으나, 원본 파일은 없고, 두루마리 그림을 갖고 있다고 했다. 결국 경주로 향했다. 가까스로 「신라 왕경도」를 손에 들고, 노을로 붉게 물든 첨성대 앞에 서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원효의 삶을 다룬 책을 만들면서, 경주를 배경으로 한 책을 만들면서, 이제야 이곳에 오다니. 결국 나를 이곳에 서게 하려고 이 모든 과정들이 있었구나. 비로소 책을 만들 자신감이 생겼다.

이렇게 『발원』은 수많은 사람들의 발원으로 탄생했다. 흔쾌히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 책을 만들며 두 가지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하나, 책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며, 둘, 책은 책상머리에 앉아 머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원효의 깨달음이 아닐까. 이제 독자들의 차례다.

민음사 편집부 김소연

김선우
출간일 2015년 5월 25일
김선우
출간일 2015년 5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