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아였을 때』 ‘기억 안 납니다.’가 이토록 매력적일 줄이야

가즈오 이시구로는 자기 고백적인 화자를 내세워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는 작가다. 우리는 그의 다른 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이나 『남아 있는 나날』에서도 그러한 화자를 보았다. 2000년작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서는 ‘상류층’, ‘훈남’, ‘사립 탐정’ 크리스토퍼 뱅크스가 그 고백의 주인공이다.

과연 이 남자가 무엇을 고백하려는 것일까? 소설은 그가 명문 사립 학교를 갓 졸업해 런던 한복판에 탐정 사무실을 내게 되면서 시작한다. 멋지게 치장한 주택, 말쑥한 양복, 고급 상점에서 산 홍차 세트……. 언뜻 들으면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독자는 이 남자가 사실 아주 소심하고 불안한 성격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동창들은 그를 ‘연줄 있는 친구를 부러워하는 가련한 외톨이’라고 기억한다. 또 그는 독자에게 장래 희망이 탐정이라는 것을 남들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았다고 확신하지만, 사실 주변 친구들은 모두 그가 탐정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탐정이 되기엔 키가 너무 작지 않아?”라고 수군거리거나 확대경을 생일 선물로 주며 낄낄대기도 한다. 이쯤 되면 독자는 이 남자가 하는 말에 신뢰를 잃고 심정적 괴리감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남자가 털어놓는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되물으며 읽어 내려가게 된다.

소설에는 ‘기억나지 않는다.’라거나 ‘기억난다.’는 말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정치인들의 관용구이기도 한 ‘기억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 소설에서 그 어떤 기법보다 더욱 빛을 발한다. 그는 바로 앞에서 말한 내용에 대해 “사실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라고 하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궁금한 지점에서 이야기를 끊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 유일한 화자인 크리스토퍼가 기억하는 것, 기억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사건의 진실은 종종 미궁에 빠지며, 독자는 모호한 사건의 결말이 궁금해 책장을 재촉하여 넘기게 된다.

이렇게 애를 태우며 진행하는 그 내용은 다름 아닌 크리스토퍼 부모님의 실종에 관한 것이다. 어린아이였던 그가 부모님을 잃고 고아가 되기 전 있었던 일들, 부모님의 단편적인 대화와 눈빛, 아이가 눈치채기엔 너무나 불가사의한 어른들의 일들……. 소설 후반에 이르러 웬만한 전쟁 첩보 영화만큼이나 긴박한 전쟁터를 누비며 사건의 핵심을 향해 다가가던 크리스토퍼는 결국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된다. 독자로서는 가장 통쾌하면서도 가장 마음이 내려앉는 부분이다.

기억하지 못했던 것, 그리고 기억했던 것 사이에서 소설은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한다. 모든 것을 다 보여 주는 소설보다, 감춘 듯 드러내는 이런 소설이 (세상 다른 모든 일에도 그러하듯이) 더욱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화법은 그래서 도무지 ‘매력적’이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뒤이어 출간될 이시구로의 다른 소설 『Un Artist of Floating World』(1986) 역시 손꼽아 기다리게 되리라 편집자는 확신한다.

 민음사 편집부 허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