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장 보드리야르가 2007년 죽기 직전에 남긴 텍스트 가운데 하나인 『POURQUOI TOUT N’A-T-IL PAS DEJA DISPARU?(WHY HASN’T EVERYTHING ALREADY DISAPPEARED?)』, ‘왜 모든 것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가?’를 옮긴 것이다.
세계화와 기술 지배를 향해 극단으로 내달리면서 인간을 비롯한 실재는 사라지고 실체 없는 이미지(시뮬라크르)들만이 가득한 현대 세계에 대한 사유가 담겨 있는 짤막한 에세이로, 원서 분량도 60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판의 분량은 104페이지로, 책을 펼치면 오른쪽 페이지에는 텍스트가 인쇄되어 있고, 왼쪽 페이지에는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이 나열되어 있다. 이 알파벳과 숫자들은 무엇일까?

사실 이 책의 디자인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워낙 압축적인 텍스트인 데다, 텍스트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왜곡할 소지가 있는 그 어떤 그림이나 사진의 삽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사물은 명명되기 직전에, 가장 치열하게 존재한다. 하나의 사물이 명명되고, 재현과 개념이 그 사물을 포박하는 순간은 바로 사물이 그 에너지를 상실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생전에 이렇게 말한 보드리야르는 상당한 실력을 소유한 아마추어 사진가이도 했는데, 2005년 한국에서 그의 사진전이 열렸을 때 관객들에게 “내 사진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 아무 생각 없이 보라”는 주문을 했다고 하니, 그의 책에 어떤 이미지를 삽입하는 건 그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는 게 아닐까.

현재의 결과물은 디자이너 유지원 씨의 작품으로, 일정한 알고리즘을 통해 텍스트를 입력하여 얻어낸 디지털 프로그래밍 이미지를 소재로 삼아 책의 공간을 디자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호들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말고, 그저 그 흐름을, 단단한 모양새의 아름다움을 즐겨 보시라. “아무 생각 없이” 보아야 하는 그의 사진처럼.

 

(New York, 1992)

 

(Punto Final, 1992)

 

(Bastille, 2000)

 

편집부 박향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