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진시황과 한 무제를 함께 일컬어 ‘진황한무(秦皇漢武)’라 한다. 한 무제는 진시황의 통일 사업을 계승해 발전시켰고, 장생불로의 길을 찾는 데 심취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면모를 많이 가졌기 때문이다. 반면 둘의 다른 점도 적지 않다. 진시황은 ‘분서갱유’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유가를 멸시하고 수많은 유생들을 죽였지만 한 무제는 그간의 주요 사상이었던 황로 사상 대신 유가를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채택하여 이후 유가가 국가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한 무제는 진시황이 세운 진나라가 겨우 2대 만에 멸망한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치국의 사상과 방법 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하여 지금의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을 진시황에, 후진타오를 한 무제에 비견하기도 한다. 마오쩌둥이 현대 중국을 일으켜 세웠다면 후진타오는 한 무제처럼 나라의 기본 시스템을 다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묘하게도 두 황제의 유가에 대한 태도도 닮아 마오쩌둥 시절 공자는 금기 단어였고 문화 혁명 때 홍위병들이 공자의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지만 후진타오는 공자의 권위를 부활시켜 문화 중국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톈안먼에는 마오쩌둥과 공자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고 심지어 최근에는 후진타오를 닮은 공자상이 만들어질 정도다.
한 무제는 위만 조선을 무너뜨리고 한사군을 세운 장본인이다. 한사군을 빌미로 고조선과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려는 동북공정을 결재한 인물이 후진타오라는 사실은 우리나라로서는 자못 씁쓸하게 느껴진다.

 

민음사 편집부 신지영

양성민 | 옮김 심규호
출간일 2012년 2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