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현대 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대표작 『픽션들』은 비단 문학에 그치지 않고 사회, 문화, 사상 전반에 걸쳐 현대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한 작품이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장 뤽 고다르, 존 바스, 움베르트 에코 등 수많은 후대의 예술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의 디자이너’ 보르헤스의 세계관과 미학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현대의 고전 『픽션들』. 작품 한 편 한 편마다 20세기 주요 사상의 모태가 되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이 열일곱 편의 단편들은,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널리 읽히기까지는 다소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1960년대에 이미 영미권과 유럽에 많은 영향을 끼치며 전적으로 수용되었던 것과는 달리 1980년대까지 정치 사회적인 환경에 따라 국내 문단을 지배한 ‘민중 문학’의 풍조는 보르헤스의 문학을 ‘엘리트 문학’으로 분류하여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비록 정식 계약을 맺지 않고 출간된 일종의 해적판이기는 했지만 보르헤스의 번역이 본격적으로 시도된 것은 1980년대 초의 일이다. 1982년 출간된 김창환 번역의 『죽지 않는 인간』에 『픽션들』의 수록작 대부분이 실린 것을 시작으로 했으나, 당시 국내 상황 때문에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하고 보르헤스를 제대로 알리는 데에 실패했다. 이후 1992년에 이르러 박병규 번역의 『허구들』이 출판되고 같은 해 김춘진 번역의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제목으로 『픽션들』에 수록된 단편 네 편이 포함된 작품집이 출판되면서 본격적으로 그 이름이 거론된 끝에 1994년 최초로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고 진행한 황병하 번역의 민음사 ‘보르헤스 전집’ 출판을 통해 비로소 보르헤스는 국내에 널리 소개되고 작품의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2011년, 국내 중남미 문학의 권위자 송병선의 새 번역으로 『픽션들』이 세계문학전집으로 다시 한 번 출간된다. 역자는 보르헤스의 작품을 새롭게 번역하게 된 배경을 크게 세 가지로 밝히고 있다. 먼저 보르헤스의 문체에 대한 고려다. 보르헤스는 유려한 문체보다 건조하고 비감정적인 문체를 요구하는 작가로, 이번 새 번역에서 역자는 설명식의 번역을 최대한 사용하지 않고, 보르헤스 본연의 문장 맛을 살리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다음으로 우리 독자들의 가독성과 수용 가능성을 고려하여 역자주를 최소화한 것 역시 이번 번역의 특징이다. 특히 국내 독자들이 허구적 이야기의 진수를 만날 수 있도록 스토리텔링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각주는 작품 읽기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으로 조정했으며, 따라서 독자들은 이 작품이 담고 있는 ‘허구와 실재’ 간의 치열한 침식과 투쟁을 보다 생생하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역자는 보르헤스의 번역에는 결코 ‘결정판’이 있을 수 없음을 새 번역의 이유로 꼽는다. “보르헤스의 작품은 변화와 움직임이 없는 화석 같은 족은 존재가 아니라,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 살아서 생동하는 작품”(「작품 해설」)이기 때문에 가능한 우리 시대에 맞는 번역을 시도했으며 앞으로의 시대 역시 그 시대에 맞는 번역이 시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 문학의 명제를 예지한 거장이 창조한 정교한 이야기의 미궁 『픽션들』. 어떤 시대, 어떤 독자들 앞에서도 한결같이 ‘무한히 갈라지는 의미의 길’을 펼쳐 보이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 사망 25주년을 맞아 새롭게 재해석된 ‘오늘의 보르헤스’를 만나 보는 것은 어떨까?

 

민음사 편집부 양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