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고국 소식을 들을까 하여 새로 온 노예들과 말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들은 대부분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중략) 그들 중 단 한 명이 내 관심을 끌었다. 팔은 잘려 나갔지만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의 조상 한 명도 자신과 같은 처지였지만 결국 구조되어 성한 나머지 팔로 기사(騎士) 소설을 썼다고 했다.

우리는 팔이 떨어져 나간 스페인 노예의 희망에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각각 하얀 성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나오는 문장들이다. 팔이 잘려 나간 스페인 노예는 세르반테스를 일컫는다. 세르반테스는 이탈리아 주재 스페인 군대에 입대하여 1571년 레판토 해전에 참전했고, 이때 왼팔을 다쳐 평생 왼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그의 별명 레판토의 외팔이(the cripple of Lepanto)’는 여기서 나왔다.) 그 후 스페인으로 돌아오던 중 알제리에서 오 년 동안 노예 생활을 했고, 귀국 후에는 돈키호테라는 대작을 남겼다.

오르한 파묵이 작품 속에서 세르반테스를 두 번이나 언급하고, 작가 후기인 「『하얀 성에 관하여에서도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세르반테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20세기의 역사가가 17세기에 쓰인 하얀 성의 필사본을 발견하여 현대어로 옮겼다고 하는 이 책의 구성은 세르반테스가 아랍 역사가 세이트 하미트 빈 엔겔리의 필사본을 번역하여 돈키호테를 썼다고 했던 설정과 일치한다.

하얀 성의 주인공 역시 서양 출신에 노예 생활을 하다가 책을 쓴 점, 세르반테스가 참전했던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 함대가 패했다는 점 등도 오르한 파묵이 깔아 놓은 재미있는 포인트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소설을 통해 오르한 파묵이 스페인에서 세르반테스의 전통을 이어 가고 있는 작가라는 평을 받은 것이 가장 큰 연결고리가 아닐까 한다.

이번에 세계문학전집(271)으로 하얀 성이 출간되면서, 검은 책내 이름은 빨강으로 이어지는 색깔 3부작을 모두 민음사에서 만나 볼 수 있게 되었다.

 

민음사 편집부 손미선

출간일 2011년 4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