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신달자와 임권택, 두 거장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아날로그를 몰아내는 디지털의 시대, 맨눈이 아니라 스크린으로 세상을 보는 이 시대를 반추해 보게 하는 두 거장의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세상에 나왔다. 101번째 작품으로 화제가 된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올리기」와, 등단 47년을 맞아 전작 시집을 낸 신달자 시인의 『종이』다. 척 봐도 교집합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종이’. 한지(韓紙) 복원을 소재로 한 「달빛 길어올리기」를 찍을 때 임권택 감독은 신달자 시인에게 물었다. “한지란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정신이지요. 종이의 질긴 정신은 죽음을 넘어왔습니다.” 시인의 답은 곧 영화의 대사가 되었다. 한편 시집 『종이』는 “종이가 사라진다는 오해가 있었다면// 앓는 종이여! 미안하다// 네 신음 소리에서// 달빛 길어 올려 내 입술을 축이겠다.”(「도서관」)라고 영화의 테마를 인용했다. 영화에서 길어 올렸던 순수한 달빛을 시인은 76편의 게송으로 노래하는 셈이다.

종이와 종이의 정신이 처한 사정은 녹록지 않다. 기술 만능, 시장 만능 사회는 ‘예’나 ‘아니요’로 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질문으로 인정하고, 사람들은 자신과 자신의 카드를 혼동하며 살아간다. 겉으로는 번듯하고 잘 정돈된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는 심장의 고동 소리 하나 듣기 힘든 세계다. 삶의 요청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서는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이 필요하다. 그 감수성은 비밀번호도, 지문도, 음성도 아닌 “얼른 달려와 미소로 열어 주는/ 사람의 목소리와 사람의 손으로 반기는 따뜻한 문”(「아날로그」)에서 살갗과 살갗을 맞대는 따뜻함이다.

디지털은 종이를 죽이고 가야 하는가. “인간의 선한 본성, 그 아름다움에 종이라는 사물을 대면시켜 보고 싶었다”는 신달자 시인과 “달빛은 아무리 많이 봐도 눈이 부시지 않아요.”(「달빛 길어올리기」)라는 임권택 감독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종이는 디지털 세상의 도래를 막는 첨병이 되어야 하는가. 그 역시 아니다. 두 거장은 자신들의 손이 아니라 그 손끝이 가리키는 달을 바라보길 바란다. 달빛이 부드러운 미소를 잃기 전에.

민음사 편집부 김윤지

신달자
출간일 2011년 3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