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고독하다. 기존의 세계에 저항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야 하기에 시작(詩作)은 세상 모든 것들을 의심하고 배반하여 결국 홀로 서야 하는 외로운 과정이다. 현대 프랑스 시단의 거장 필립 자코테(Philippe Jaccottet)도 “그대 글 쓰는 동안 (죽음이) 숨을 돌리리라 믿지 말라”고 할 만큼 철저하게 은둔하며 집필에만 몰두해 온 시인이다. 그런 그가 1999년 한국으로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당신의 시를 읽으며 감명을 전하기 위해 펜을 들었습니다. 당신의 시를 읽으며 나는 얼마나 감동하고 있는지, 지금처럼 나의 내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이런 우연한 만남으로 내가 얻은 힘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습니다.”

물리적 거리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전달된 이 메시지의 수신자는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이라고 일갈했던 『산정묘지』의 조정권 시인이다. 프랑스의 시 전문 계간지 《포에지》에서 한국 시인 특집으로 실은 「산정묘지」를 자코테가 읽고 고맙다는 인사를 보내온 것. 이 편지에 조정권은 “은둔하는 시인들의 고독을 자신의 시가 위로해 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조정권 역시 스스로 “절대 외로워야만 시를 쓸 수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고독을 벗 삼아 살아온 시인이다. 문예진흥원에서 20여 년간 봉직할 때 집과 직장만을 오가던 그였다. 6년 만의 시집 『고요로의 초대』에서도 “외로움은 시인들의 은둔지”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외로움은 신성한 성당/ (중략)시인은 1인 교주이자/ 그 자신이 1인 신도”라며 시인의 고독을 종교적 수준까지 끌어올려 상찬한다.
강철 같은 정신, 철저한 고집을 감추고 묵묵히 길을 걷는, 그래서 길을 만드는 조정권은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시인이다. 그는 “내 삶은 수신자가 없다”고 하지만 그의 시가 보내는 주파수에 저 먼 구라파의 시인이 감응했다. 그렇게 조정권의 시는 “수신지 없는 편지처럼” 떠도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아니, 어느 날 문득 “삶이 반송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모든 이에게 살뜰한 위로가 되어 줄 것이다.

잔디는 그냥 밟고 마당으로 들어오세요 열쇠는 현관문 손잡이 위쪽
담쟁이넝쿨로 덮인 돌벽 틈새를 더듬어 보시구요 키를 꽂기 전 조그맣게 노크하셔야 합니다 적막이 옷매무새라도 고치고 마중 나올 수 있게
대접할 만한 건 없지만 벽난로 옆을 보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장작이 보일 거예요 그 옆에는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흔들의자
찬장에는 옛 그리스 문양이 새겨진 그릇들
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소찬을 벌인 지도 오래되었답니다
방마다 문을, 커튼을,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쉬세요 쉬세요 쉬세요 이 집에서는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도 손님이랍니다
많은 집에 초대를 해 봤지만 나는
문간에 서 있는 나를
하인(下人)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가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무거운 머리는 이리 주시고요
그 헐벗은 두 손도
―「고요로의 초대」 전문

 

민음사 편집부 김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