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국에서는, 장쩌민과 후진타오 전현 주석들이 수시로 “강희제를 배우라.”라고 강조할 만큼 청나라 제4대 황제 강희제의 리더십을 배우는 데 열중해 있다고 한다. 강희제의 치세에서 중국의 미래를 찾아보려는 노력이다. 그렇다면 강희제는 중국인에게 어떤 인물일까? 강희제는 여러모로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과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 세종대왕이나 강희제 모두 건국 초기에 나라의 기틀을 다진 성군으로서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태종의 셋째아들로, 북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현재의 국경을 완성했고 대마도 정벌을 통해 외부 위협을 차단했다. 강희제도 선왕 순치제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명나라 잔존 세력, 몽고족, 대만 등 집권 초기 정권을 위협하는 여러 세력들을 정벌하며 왕권을 키워 나갔다. 이러한 대외의 안정을 바탕으로 두 왕이 국내 체제를 정비해 나가는 과정도 비슷한 궤도를 이룬다. 현실적 토지 정책으로 곡물 수확량이 크게 늘었으며, 백성의 실제 삶에 맞는 조세 제도를 시행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탐관오리를 철저히 단속하여 유명한 청백리들이 많이 생겨났다. 또한 두 왕 모두 끊임없이 학문에 매진한 군주로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서슴지 않았다. 세종대왕은 세계상 유례없는 한글을 창제할 만큼 뛰어난 언어학적 능력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장영실 등을 채용하여 과학 기술이 발전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으며, 강희제는 학자들을 독려해 중국 최대의 자전인 『강희자전』을 편찬하는 한편 서양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고 배우는 데 열정적이었다. 이로써 조선왕조 600년을 지탱한 태평성대와 팍스 시니카를 이뤄 낸 ‘강건성세(강희ㆍ옹정ㆍ건륭으로 이어지는 성세)’가 이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업적의 바탕에는 두 왕의 백성을 ‘어여삐 녀기는’ 마음이 있었다. “민생과 관련이 있으면 반드시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시행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민생과 관계되는 일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라는 강희제의 신조처럼 말이다.

민음사 편집부 신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