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하는 눈물을 머금었고
백성은 슬픔에 잠기었다
혼백은 떠나갔지만
공훈은 빛을 내고
육신은 묻혔지만
이름은 드날린다
삼가 성덕을 들춰
흰 깃발에 쓰노라

조조의 아들로, 붓만 들면 문장이 되었다는 시인 조식이 쓴 조문 「무제뢰(武帝誄)」의 서문이다. 아들이 썼다고는 하지만 이 시에 나타나는 분위기가 결코 거짓은 아니다.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조조의 이미지, 잔혹하고 교활한 모습에 미루어 보면 오히려 조조의 죽음이 백성들에게 해방감을 주었을 법도 하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지난해 중국 허난성에서 발견되어 그 진위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조조의 무덤에는 백성들의 애도 속에 묻힌 탁월한 통치자 조조가 있었다. 장쭤야오의 『조조 평전』은 사라진 무덤처럼 역사 속에 묻혀 버린 그의 이면을 조명해 온전한 조조를 되살려 낸다. 조조는 뛰어난 군사 전략으로 야심 차게 세력을 키워 나가면서도 백성들을 위해 사회 질서와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에 힘썼다. 독창적 정책과 제도를 통해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사회의 불합리한 관습이나 풍조를 정화하면서 조조 스스로도 평생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 자신이 죽으면 간소하게 장사지낼 것을 미리 명하기도 했는데, 이는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물을 낭비하던 후장(호화롭게 치르는 장례) 풍습을 금지하여 사회를 안정시켰던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조조는 죽기 1년 전쯤 발표한 「종령(終令)」에서 “본래 언덕 높이 그대로 무덤을 만들며, 흙을 쌓아 봉분을 높이 올리거나 나무를 심지 말라.”라고 주문하고, 임종 전 마지막으로 내린 교령인 「유령(遺令)」에서는 “무덤에 황금이나 주옥, 진귀한 보물 따위는 넣지 말라.”라고 지시하여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지켜 낸다. 유언에 따라 수수하게 지어진 조조의 무덤은 오래지 않아 사람들에게 잊혔고 부장품이 없었기에 찾으려는 도굴꾼마저도 없었다. 이렇게 흔적이 사라진 조조의 무덤을 두고 나관중은 『삼국연의』에 ‘72의총’ 전설을 끌어들여 남들이 파헤칠까 염려해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속임수에 능한 조조의 간사한 이미지를 더욱 극대화했다. 조조의 무덤은 그의 원대한 식견을 대변하는 것이었음에도 오히려 왜곡되어 간교한 면모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것이다.

민음사 편집부 신지영

장쭤야오 | 옮김 남종진
출간일 2010년 10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