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노트] 작가 이응준, 『국가의 사생활』을 말하다

어둠으로 희망을 그리는 소설

 

통일 이후의 우리 사회를 어둡게 그렸다는 이유로 『국가의 사생활』에 대한 독자분들의 여러 가지 걱정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온지 채 한 달이 조금 넘은 졸작에 보여주시는 관심에 재주없는 작가로서 큰 기쁨을 느낄 겨를도 없이 무거운 책임감에 깊이 가라앉는 요즘입니다. 그러나 정작 제가 두려워하고 있는 바는 맑은 심성과 지혜로운 지성을 지닌 대다수 독자분들의 『국가의 사생활』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애초부터 어떤 목적을 설정해둔 채 『국가의 사생활』을 오용하고자 하는 어떤 이들의 의도입니다.

전자의 경우, 저는 독자와 책과의 순수한 사랑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시간의 숭고한 힘을 믿습니다. 저 역시 거의 모든 책들 앞에서 다소간의 진통을 겪으며 작가로까지 성장해왔습니다. 그 진통은 예술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당연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며 그래서 오히려 권할 만한 것일 겝니다. 그러나 후자는 그 차원이 전자와는 아예 매우 다릅니다. 이런 경우 작가는 우선 응급책의 발언이나마 일단 남겨두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여기는 서독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아닙니까? 또『국가의 사생활』은 작가인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태생이 불온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피차 탓하진 맙시다. 문제가 많은 집안에서 문제아가 생길 확률이 높을 테니까요. 다만 저는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고 했던 시인 김수영의 말에 의지해 애써 위로받고자 합니다. 『국가의 사생활』 속 통일 대한민국의 어두운 미래에 놀라워하시는 독자분들께 저는 반문하고 싶습니다. 남북 통일 이후가 양호하리라고 예상하는 남한 사람들이 정말 있습니까? 그런 낙관의 달인들이 정말 우리 주위에 있습니까? 당신들의 놀라움은 혹시 평소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생각조차 하기 싫었던 것, 그래서 무의식 속에 꼭꼭 숨겨놓았던 과학적 악몽을 갑자기, 문득 보아버린 것에서 비롯된 놀라움은 아닐런지요?

대작가 고 박경리 선생님께서 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절망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엔 절망하는 사람이 의외로 없어요. ‘어떻게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삽니다. 희망, 희망 하는데 그거 무책임한 말이에요. 불확실한 가짜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면 분명 벼랑 끝에 서있고 절망뿐인데도 인간들은 좋은 쪽으로 자위합니다. ‘다 죽어도 나는 살겠지’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어요.” 이제는 우리와 아주 다른 곳에서 마치 우리와 함께 있는 듯 우리 걱정을 하고 계실 대작가의 저 말씀 속 절망이 저는 과학에 근거한 절망이라고 믿습니다. 포기하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향한 절망이라고 믿습니다. 어둠에 휩싸여 있다면 우선 그 어둠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 있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만 빛을 향해 걸어나갈 수 있습니다.

환란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고통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어둠은 없는 척 한다고 물러나지 않습니다. 직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개인이건 국가건간에 제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소설가 한승원 선생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가들이 뎃생을 하는 것을 보면 아주 재미있고도 중대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화가는 그리려고 하는 대상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구분한다. 그런 다음 목탄이나 검은 연필로 그 대상의 어두운 면과 그림자를 그려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대상의 밝은 면과 빛은 자동적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대는 어떠한 시대이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인가를 파악하기 위하여는 오늘의 사회나 역사의 어두운 면과 그늘진 곳에서 이야기 거리를 찾아야 한다.” 저는 감히 과학에 근거하여 『국가의 사생활』속 그늘을 새겼습니다. 제가 칠한 어둠을  보지 말란 뜻이 아니라 그 그늘과 함께 그 그늘이 그린 그림을 보아달란 뜻입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그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봐야 합니다. 장자는 말이 담고 있는 뜻을 얻었으면 그 말은 버리라고 했습니다. 문학은 정답이 아니라 의미 있는 질문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통일을 무서워하거나 걱정이나 하자고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닙니다. 함께 고민하고 질문하자는 뜻에서 썼습니다.

『국가의 사생활』이 호소하고 있는 메시지는 한 단어로 ‘변화’입니다. 혹독한 환란 속에서도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여 끝끝내 긍정적인 변화를 성취해내는 개인과 국가의 실존을 위해서 저는 이 소설을 썼습니다. 그리하여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통일이 되어 우리는 불행하다. 하지만 나는 너를 만나서 좋았다.”가 될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보자는 뜻일 겁니다. 작가 이응준은 반통일주의자가 아니고 그가 쓴 『국가의 사생활』은 반통일소설이 아닙니다. 독자분들 각자의 삶이 환란 속에서 좌절하는 삶이 아니라 그 환란을 계기로 자신을 찾는 일에 건승하시는 삶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사생활』이 세상의 광활한 바다로 더 멀리 나아가 50년전 대작가 최인훈 선생님의 『광장』 속 주인공 이명준처럼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제 운명의 주인으로 제 온전한 삶을 찾아가기를 소망하며 덧없는 졸필을 거둡니다. 

 

출처 : 교보문고 <사람과 책> 6월호 저자의 북메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