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공동 창업주이자 전 CEO, 21세기를 움직인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가 살아생전 직접 참여했으며, 유일하게 인정한 공식 전기 『스티브 잡스』가 미국 동부 시간으로 10월 24일 전 세계 동시 출간된다. 한국판 역시 (주)민음사에서 한국 시간으로 10월 24일 출간할 예정이다. 다음은 지난 10월 6일 스티브 잡스 타계 이후 잡스의 오랜 친구이자 『스티브 잡스』의 저자인 아이작슨이 《타임》에서 스티브 잡스에 대해 발표한 전문이다. 온라인에서 볼 수 있으나, 유료 구독자에게만 공개되는 내용이다.

 

스티브 잡스를 기리며

스티브 잡스의 전설은 언론에 대서특필된 대로 디지털 혁명의 창조 신화에 관한 것이다. 부모의 차고에서 사업을 시작해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회사로 키워 낸 이야기 말이다. 우리 삶을 바꾼 수많은 것들을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발명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잡스는 아이디어와 예술과 기술을 결합해 미래를 창조하는 방식을 완벽하게 꿰고 있던 대가였다. 그는 그래픽 인터페이스의 힘을 이해하고 매킨토시를 디자인했지만, 제록스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주머니 속에 수천 곡의 노래를 집어넣고 다니는 즐거움을 알아채고는 아이팟을 창조했지만 소니는 엄청난 자산과 유산을 축적해 놓고 있었는데도 결코 그 일을 해낼 수 없었다. 어떤 리더들은 큰 그림을 잘 그림으로써 혁신을 밀어붙일 수 있었으며, 어떤 리더들은 세부적인 것들을 완벽하게 챙김으로써 혁신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잡스는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양쪽을 모두 해 냈다.
결국 스티브 잡스는 개인용 컴퓨터(PC), 애니메이션 영화, 음악, 전화기, 태블릿 컴퓨팅, 디지털 출판 등 여섯 가지 산업을 혁명적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일곱 번째 산업을 추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소매업 말이다. 잡스는 소매업을 혁명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 기본 개념을 다시 상상해 보려고 했다. 그는 세상을 뒤바꿀 만한 제품들(transforming products)을 생산해 내는 동시에 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영구불변한 회사를 만들려고 했다. 그의 비전을 품고 미래를 개척할 창조적인 디자이너들과 모험심에 불타는 엔지니어들로 가득한 그런 회사 말이다.
스티브 잡스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비즈니스 경영자이자, 인류가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동안은 기억할 만한 위인의 반열에 올랐다. 역사의 신전에서 그는 토머스 에디슨과 헨리 포드의 다음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시(poetry)와 (컴퓨터) 프로세서의 힘을 결합해서 잡스는 완벽하게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 냈고, 이 시대의 다른 어떤 사람도 그보다 더 그러한 일을 잘해 낼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은 영감을 부여받는 만큼이나 마음 불편한 일이었지만, 그 사나운 열정을 통해 그는 (최소한 올해의 한동안만큼은 틀림없이) 세계에서 가장 주가가 높은 회사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는 그 회사에 디자인 감수성, 완벽주의, 그리고 상상력을 심었으며, 그로써 애플은 앞으로 적어도 수십 년 동안 예술성과 기술성의 상호작용을 최선을 다해 추구하는 회사로 남을 것이다.
2004년 초여름, 나는 잡스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나와 친근하게 이런저런 말들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물론 때때로 격정적인 말들이 오갈 때도 있었다. 특히 그가 새 제품을 출시하면서 그것이 내가 일하고 있던 ≪타임≫의 표지나 CNN에 보도되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더 그러했다. 그러나 더 이상 그곳에서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즈음 그가 나에게 소식을 전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우리는 애스펀 연구소(the Aspen Institute)에 대해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에 거기에 합류한 나는 잡스에게 콜로라도에서 열리는 우리의 여름 계절 학기에 와서 연설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기꺼이 가겠지만 연단에 서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 대신에 그는 산책을 하면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건 다소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오랫동안 함께 산책하는 것이 그가 진지한 대화를 하고자 할 때 선호하는 방식임을 알지 못했다. 함께 산책을 하면서 그는 나에게 자신의 자서전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나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전기를 막 출판했던 참이었고,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쓰던 참이었다. 농담 삼아 말하자면,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잡스가 스스로를 그들의 뒤를 이을 만한 후계자로 여기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잡스는 아직 변화무쌍한 인생 경력의 한가운데 있으며, 앞으로도 수많은 부침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발심이 일었다. 그래서 지금은 아니라고 했다. 10년이나 20년 후에 당신이 은퇴할 때 그러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나중에 나랑 전화하기 전에 스티브 잡스가 첫 번째 암 수술을 앞두고 있었음을 알았다. 스스로 깜짝 놀랄 만한 감정적 낭만주의와 경외감이 섞인 강렬한 관심이 결합된 마음으로 그의 암 투병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점차 그에게 깊게 끌리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그가 만들어 낸 제품들에 그의 개성이 깊게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정열, 완벽주의, 귀재, 욕망, 예술적 감각, 악마성, 그리고 통제에 대한 집착 등이 사업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과 단단히 결합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창조성의 전범으로 다루기로 결심했다.
스티브 잡스의 개성과 그가 만들어 낸 물건들을 서로 묶어 이해하려는 통일장 이론은 그의 가장 뚜렷한 특징, 즉 그의 강렬한 집중력(intensity)과 함께 시작한다. 심지어 그것은 잡스의 고등학교 시절에도 이미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때부터 그는 거의 채소와 과일만 먹는 극단적인 식단으로 평생의 실험을 했는데, 그 결과 그는 경주용 개 휘펫처럼 날씬하고 단단해 보이는 몸매를 갖게 되었다. 또 그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보는 법을 배웠으며, 긴 침묵 사이사이로 빠른 속도로 내뱉는 말을 스타카토처럼 폭발시키는 독특한 화법을 완성했다.
이 강렬한 집중력은 그의 마음속에 이원론적 세계관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동료들은 ‘영웅/돌대가리(hero/shithead)’의 이분법을 언급했다. 잡스에 따르면, 그들은 이쪽 아니면 저쪽이었고, 때때로 같은 날에도 그 평가는 왔다 갔다 했다. 똑같은 원칙이 제품들, 아이디어들, 심지어 음식들에도 적용되었다. 잡스에게 어떤 사물은 “지금껏 존재한 적이 없었던 최상의 것”이 아니면 전적으로 몹쓸 것이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은 절대로 구분할 수 없는 아보카도 두 종류를 맛보고는 그중 하나는 잘 숙성된 최상의 것으로, 다른 하나는 전혀 못 먹을 것으로 선포해 버렸다.
스티브 잡스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했으며, 그 덕분에 그는 내면에 디자인에 대한 한없는 열정을 품을 수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최초로 매킨토시 컴퓨터를 만들었을 때, 그는 “더욱 친숙한” 디자인을 고집했는데, 그러한 생각은 당시 컴퓨터 하드웨어 기술자들에게는 너무나 낯선 개념이었다. 그의 솔루션은 매킨토시에서 사람 얼굴을 떠올리도록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심지어 그는 스크린 위에 달린 띠를 더 얇게 만들어서 네안데르탈인 얼굴처럼 보이지 않게 하자고 주장했다.
잡스는 최상의 디자인이 보내오는 신호들을 직관적으로 이해했다. 1998년에 그와 그의 디자인 파트너인 조니 아이브가 처음 아이맥(iMac)을 만들었을 때, 아이브는 아이맥 상단에 손잡이 하나를 달아야만 한다고 결정했다. 그것은 기능적이라기보다는 재미있고 기호학적인 장치였다. 이것이 바로 데스크톱 컴퓨터였다. 실제로 가지고 다닐 때 그것을 쓰려 했던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신호, 즉 사람들이 기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였다. 당신이 그것을 쥐면, 그것은 당신에게 경의를 표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기술자들은 그러려면 비용이 더 든다고 반대했지만, 잡스는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다.
잡스의 완벽에 대한 추구는 애플이 만드는 모든 제품을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끌었다. 해커들과 애호가들은 대부분 많은 것들을 바꾸어 컴퓨터를 자기에 맞게 고치고 변형하고 향상하고 싶어 한다. 잡스에게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무결한 사용자 경험을 주고자 하는 그의 시도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잡스는 그의 본래 파트너, 즉 해커 마인드로 충만했던 스티브 워즈니악에 끝까지 동의할 수 없었다. 애플 II 컴퓨터를 만들 때 워즈니악은 소비자들이 작은 회로기판과 주변 장치들을 집어넣을 때 이용할 수 있도록 슬롯 여덟 개를 집어넣고 싶어 했다. 잡스는 마지못해서 그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몇 년 후에 매킨토시 컴퓨터를 만들 때, 그는 자기 방식대로 그것을 처리했다. 거기에는 여분의 슬롯이나 포트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애호가들이 그것을 열고 변형할 수 없도록 특수한 나사를 사용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통제 본능 탓에 잡스는 심사숙고해서 만들어 낸 애플의 위대한 소프트웨어가 다른 회사의 엉망진창인 하드웨어에서 구동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마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 지경이었으며, 때때로 그것이 악화되곤 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승인받지 않는 애플리케이션이나 콘텐트가 애플 디바이스의 완벽성을 오염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와 콘텐트를 하나의 통합된 시스템 안에 통합하기 위해 잡스는 단순성에 집착했다.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자연은 단순성과 통일성(unity)을 사랑한다.”라고 선언했다. 스티브 잡스 역시 그러했다.
이 때문에 잡스는 매킨토시 운영 체제를 다른 회사의 하드웨어에서 이용할 수 없도록 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정반대 전략을 추구했는데, 따라서 윈도 운영 체제는 난잡하게 허가권을 팔아치웠다. 그것은 가장 우아한 컴퓨터들을 생산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전 세계 운영 체제를 지배하도록 만들었다. 애플의 시장 점유율이 5% 이하로 축소되자 마이크로소프트의 접근 방식은 개인용 컴퓨터 영역의 우승자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결국 잡스 모델의 몇몇 이점이 증명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려 했던 그의 고집은 2000년대 초 애플이 디지털 허브 전략을 개발하는 데 커다란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애플은 데스크톱 컴퓨터에 다양한 휴대 장치들을 오작동 없이 연결하고 디지털 콘텐트를 편리하게 관리하는 데 우위에 서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아이팟(iPod)은 폐쇄적이고 긴밀하게 통합된 시스템의 한 부분이다. 그것을 사용하는 소비자들은 애플의 아이튠스(iTunes) 소프트웨어를 이용해야만 하고 아이튠스 스토어에서 콘텐트를 내려 받아야 한다. 그 결과 뒤를 이어 나온 아이폰, 아이패드와 마찬가지로 아이팟은 소비자들에게 아주 우아한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류 없는 사용자 경험을 결코 제공하지 못하는 다른 너저분한 경쟁 제품들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스티브 잡스에게 통합적 접근에 대한 신념은 올바름의 문제였다. 그는 설명했다. “우리는 온갖 변종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이렇게 일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위대한 제품을 만들고 싶기 때문에, 이용자들을 우선 배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서 결국 쓰레기가 되는 것보다는 사용자 경험 전체를 기꺼이 책임지고 싶기 때문에 이렇게 일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이용자들에게 서비스하는 중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느라 바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최선의 일을 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들의 삶은 늘 이런저런 일들로 붐빕니다. 그들이 컴퓨터와 디바이스를 어떻게 통합할지 고민하는 것보다는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쓰레기 같은 디바이스들, 형편없는 소프트웨어들, 이해할 수 없는 오류 메시지들, 그리고 짜증나는 인터페이스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스티브 잡스의 통합적 접근 방식은 기쁨에 넘치는 사용자 경험을 특징으로 하는 놀라운 제품들을 만들어 냈다. 애플의 제품들을 사용하는 것은 잡스가 평소에 사랑했던 교토의 선사 뜰을 거니는 것만큼이나 숭고한 경험을 빚어낸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은 개방성이라는 제단을 숭배하거나 수천 송이 꽃들을 피어나게 하려는 전략에서는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다. 물론 그중에서도 변종들을 통제하는 경우에 가끔 멋진 제품이 나올 때도 있지만 말이다.
몇 주 전 나는 마지막으로 팰러앨토(Palo Alto)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다.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할 만큼 약해져 있었던 탓에 그는 아래층에 있는 침실로 옮겨져 있었다. 고통 때문에 몸을 움츠리기는 했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 날카로웠고 그의 유머는 여전히 빛났다. 우리는 그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고, 그는 나에게 아버지와 가족들 사진을 몇 장 주면서 전기에 사용하라고 했다. 작가로서 나는 애써 초연하려고 했지만, 안녕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슬픔의 물결이 가슴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감정을 숨기려고 나는 그때까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질문 하나를 던졌다. 지난 두 해에 걸쳐 거의 쉰 번에 이르는 인터뷰와 대화를 하는 동안 내내 궁금했던 것이었다. 평소 잡스는 사생활을 거의 노출하지 않았는데, 이 책 한 권을 위해 그토록 많은 일화들을 기꺼이 공개하고 싶어 했을까? 그는 말했다. “아이들이 나에 대해 알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늘 그들과 함께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왜 그렇게 했는지를 아이들이 알기를 원했고, 내가 했던 일들을 이해하기를 원했습니다.”

2011년 10월 6일
월터 아이작슨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
현재 애스펀 연구소의 CEO로 있으며, CNN의 CEO와 《타임》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아인슈타인과 벤저민 프랭클린의 전기를 집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