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 뒤로

1802년 2월 26일 프랑스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유럽 각지를 옮겨 다니며 성장했다. 일찍부터 고전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샤토브리앙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는 포부를 품고 있었다. 1819년 열일곱의 나이로 평론지 《르 콩세르바퇴르 리테레르》를 창간하고, 1822년 첫 시집 『송가와 다른 시들』을 발표하며 계관시인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운문 희곡 「크롬웰」(1827)과 「에르나니」(1830)를 통해 진정한 낭만주의 작가이자 자유주의자로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1831년 『파리의 노트르담』을 펴내며 소설가로서 명성을 굳혔고, 입헌군주 루이 필리프의 집권을 기념하는 시 「1830년 7월 이후」를 발표한 후부터 수많은 정치 시를 발표하며 정치적 참여 시인으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841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뽑히고 1845년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문학적 업적을 널리 인정받았다. 그러나 1848년 2월 혁명을 계기로 왕당파에서 철두철미한 공화주의자로 변신하여 루이 나폴레옹과 날카롭게 대립했다. 1851년 나폴레옹 3세의 집권과 함께 시작된 20여 년의 망명과 추방 생활 동안 그는 아내와 자식들을 차례로 잃었다. 고난 속에서도 식지 않는 창작열로 또 다른 대작 「레 미제라블」(1862)을 발표하여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870년 예순여덟의 노구로 파리에 귀환하여 이듬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말년에 살았던 파리의 엘로 거리는 80세 생일을 기념하여 ‘빅토르 위고 거리’로 개칭되었다. 1885년 5월 22일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프랑스 정부는 국장으로 예우했으며 “그의 시신은 밤새도록 횃불에 둘러싸여서 개선문에 안치되었고, 파리의 온 시민이 판테온까지 관의 뒤를 따랐다.”(G. 랑송)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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