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무관심과 살기 사이

 

 

지난주에 친구네 집들이 선물로 ‘집’을 선물했어요. 덕분에 넌 집이 뭐라고 생각해? 대화가 이어졌는데요. 내 방(부모님과 함께 사는 경우), 집(혼자 사는 경우), 집에 들어왔을 때 나를 맞아 주는 사람과 고양이……라는 답변들을 들려 주었어요.

저는 일주일에 한두 번 달리러 가는 집 근처 공원 역시 나의 집 같아요. 지난 여름에는 멀리서부터 뛰어서 공원에 들어서는데 입구의 작은 시냇물 덕분에 순식간에 시원해지는 거예요. 혹독한 더위에 말라 가던 차에 기분이 무척 좋고, 살 것 같고, 여기까지 내 집이야! 하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집은 닫혀 있지 않고, 바깥과 통하고 있고 또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우주 역시 나의 집 이야기가 아닐 수 없어요.

저의 집 중 하나인 지방에 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요. 관련해서 다나카 데루미의 『관계인구의 사회학』을 읽고 있어요. ‘관계인구’는 한국보다 먼저 지방 인구 감소 상황을 맞닥뜨린 일본에서 나온 개념이에요. 정주인구도 아니고 잠시 머물다 떠나는 관광객도 아닌 관계인구는 그 지역에 관심을 갖고 관여하는 이들을 말해요. ‘관심’이라고 하니 명절마다 고향을 찾아가는 동료들, 재택근무하며 강원도 바닷마을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왜인지 마음에 남아서 같은 도시를 여러 번 찾아가는 친구들, 서울 아닌 도시들을 언젠가 살 곳으로 탐색하고 마음에 품고 있는 주변 사람들이 생각났어요.

관심 있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면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 책은 미처 몰랐던 지역의 ‘보물’들이 외부인의 시선에서 발견되어 지역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이어지고 그 결과 지역에 활력이 생기는 사례들이 등장합니다. 가령 시네마현 아마정 주민들이 먹는 ‘소라카레’가 외지인들과 지역 주민들의 협력을 통해 상품으로 만들어져 판매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물론 출신지, 의사소통 방식, 지역에 대한 태도가 천차만별인 주민들과 외부인이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많은 오해와 시행착오가 뒤따릅니다. 지난 레터에 소개된 『누가 도시를 통치하는가』도 생각나는 책이었어요. 

근처 공원을 ‘내 영역‘으로 삼은 세영 편집자님 이야기 운동 자극제네요. 아직 쌀쌀해도 해가 길어졌으니까 저도 이번주부터 동네 달리기 재개할 거예요.(진짜)
저는 긴 휴가를 다녀와서 소생했죠. 가장 멀리 떠났던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아, 집에 가고 싶다.” 하는 말을 뱉었어요. 평소에는 삼가는 말인데…… 여행의 목표였지만 마지막까지 미뤘던 곳에 도달해서 해가 지고 한기가 들던 순간이었어요. 수용소에서 어땠는지는 뭐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여행에서 읽은 책에 관해 독후감을 쓰기로 했죠.
낯선 곳에 무관심해질 때는 친구들과 프리모 레비에 의지했는데요. 엄마에게, 미선 편집자님에게 추천받았던 『주기율표』를 마침내 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한 화학자이자 작가인 프리모 레비가 아르곤, 수소, 아연, 철, 칼륨 등등의 원소를 둘러싼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었어요.
돌베개 출판사에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서경식의 추천과 함께, 그의 편집자 김희진이 만들었다는 이 책의 선명한 서지사항을 보면서 제 안에서 꺼져가던 불꽃이 되살아났어요. 그냥 책을 만들고 남기고 하는 게 단순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렇게 책 만드는 일을 긍정.하기로 했습니다. ㄷㄷ
“우리는 우리 힘으로 계곡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나, 우리의 얼빠진 얼굴을 쳐다보며 낄낄거리는 여관 주인의 물음에 멋진 소풍을 갔다왔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계산을 했다. 그러고는 위엄을 갖춘 채 그곳을 떠났다. 이것이 바로 곰고기 맛이었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그것을 더 많이 먹어보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삶이 내게 선사한 모든 좋은 것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까마득한 옛날 일이긴 해도 그 고기 맛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고기 맛이란 강인함과 자유의 맛, 실수도 할 수 있는,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자유의 맛이다. 그래서 나는 산드로가 의식적으로 나를 고생과 여행 속으로, 겉보기만 어리석어 보이는 여러 모험 속으로 인도해준 데 대해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철」 중에서)
새벽 편집자님이 여행길에 들고 간 『주기율표』는 저도 너무나 좋게 본 책이라 추천하고 싶어요. 발췌에서 짐작하실 수 있듯 ‘원소’보다 ‘자기 이야기’가 초점인 책입니다만, 과학책 읽기 모임의 읽기 목록에 꼭 넣고 싶은 한 권이랍니다.
저는 한 달째 어디 떠나지 않고 집순이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6년 만에 새 시즌이 나온 『크라임씬 리턴즈』를 챙겨 보려 오랜만에 OTT 서비스에 가입했어요. 플레이어가 각자 맡은 역할에 맞게 연기하며 추리를 이어나가는 것이 크라임씬만의 묘미죠. ‘내 집’의 반경은 가만히 둔 채 스크린 속 범죄 현장과 캐릭터의 사연으로 다른 삶의 재미를 충전하고 있어요. 여러분의 요즘 ‘집 안’과 ‘집 밖’ 이야기도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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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수라도 마지막 n석 남았답니다!)
– 매번 정성이 가득한 편지를 받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ㅎㅎ 무엇보다 <한편>을 홀로 읽는 느낌이 아닌 레터를 통해 같이 읽고 가이드를 받는 것 같아서 완독이 자연스럽게 되곤 하네요.

지난 주에 있었던 박진영 선생님과의 세미나는 놓쳤다가 보내주신 링크로 보강하듯이 들었는데 너무 유익했습니다. 이렇게 놓친 독자까지 챙겨주는 한편/인문팀에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합니다. 세미나 내용 중 오늘날도 계속되는 집 안 화학물질 사용에 대한 고민에 크게 공감하면서 기업, 정부가 더 쉬운 가이드를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 겨울님과 함께하는 온라인 세미나 기대중입니다!^_^
– 문화인류학 전공자로서 민음사의 관심이 반가워요! 한국에서는 소위 말하는 메이저 학문이 아니어서 우리끼리는 늘 ‘한줌단’이라 부르고는 했는데, 유명인사가 갑자기 연구실 문을 노크하고 찾아온 것만 같은 느낌.. 많은 분들이 더더욱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부지런히 연구 성과를 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마침 이 편지를 쓰는 오늘을 기준으로 내일(2024년 2월 24일)은 음력 1월 15일, 정월대보름이랍니다. 저는 매해 그랬듯이 동제라는 의례를 조사하러 가는데요. 이번에 가는 곳은 아파트 숲이 가득 들어찬 동네이지만, 주민들은 “보름 전 자시까지 당나무 앞으로 오세요.”, “몸을 정갈히 하고 와주세요.”라고 말씀하신답니다. 동제를 조사할 때마다 음력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고, 달의 변화와 나이든 나무의 물성과 사람들의 존재가 새삼스럽고, 아파트가 들어서지 않았던 시절의 마을 풍경도 떠올려보게 됩니다.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평안을 기원하는 주민들의 마음을 확인하기도 하고요. 대체로 동제는 나보다는 남의 무탈을 기원하기에, 저 역시 조사 현장에서 괜스레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봅니다. 누군가는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렸어도, 또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기억하고 기원하고 있답니다. 대보름을 맞이해서 민음사 선생님들과 우리의 모든 친구들의 일상도 무탈하기를 바랄게요. 몇 해 전 동제 조사에서 소지를 올릴 때(축원하면서 흰 종이를 불에 태우는 행위), 한 주민이 했던 말씀을 전합니다. “하는 것마다 향기롭고, 하는 말마다 향기롭고,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환영받고 칭송받는 동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선생님들은 민음사라는 동네에 같이 사는 사람이니까!(찡긋) 늘 고맙습니다. 평안하셔요.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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