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를 클릭하면 팟캐스트 ‘출근하는 독자들’ 인문잡지 《한편》 ‘우정’ 편을 들을 수 있어요!
사연 하나 더. 《한편》 ‘우정’ 호에 발맞춰 계속해서 편지들을 소개해드리고 있는 가운데 아래의 편지를 받았어요. 감동적인 편지 함께 읽어주세요. 그리고 이 편지를 쓰신 독자님은 1p@minumsa.com으로 회신을 보내주시겠어요? 새로 나온 책 『글 쓰는 여자들의 특별한 친구』 증정 이벤트에 당첨되셨기에 책을 발송해드릴 주소가 필요합니다……
“조금 지났지만, ‘편지는 지상의 기쁨’이라는 편지를 받아보고 너무 좋아서 뒤늦게 의견을 남겨봅니다. 저는 스무 살 대학생이고, 주변에 재수를 하는 친구들이 정말 많아요. 그중 기숙학원에 있는 친구에겐 학원 홈페이지로 꾸준히 ’응원의 편지‘를 보내고 있는데요. 처음에는 그냥 근황이나 주변 소식을 전해주고 응원의 말을 건네는 것에 그쳤는데,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일이 지속되면서 어느 순간 이 친구와의 관계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견고해졌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런데 응원의 편지를 쓰고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떠오르는 생각들이 한편의 편지에 그대로 담겨 있어서 참 신기했어요. 편지에는 진짜가 아닌 말을 쓰기 어렵다든가, 누군가와 만나지 않고도 우정을 주고받고 서로 변화하는 것이 가능하다든가…… “친구들이 보낸 편지는 시인 같다”는 말처럼,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고 차가워 보이던 제 친구가 보낸 메일은 전에 본 적 없던 솔직한 모습으로 가득 차 있어서 감동받기도 했고요. 쓰다 보니 많이 길어졌네요. 덕분에 에밀리 디킨슨의 『결핍으로 달콤하게』를 꼭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그리고 한편 편지 얘기를 친구에게 응원의 편지로 전해줬는데, 친구도 저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수능이 끝난 다음 주면 웃으면서 이 얘기를 나눌 수 있겠죠?”
수능을 하루 앞두고 이 편지를 소개해드리면서 많은 생각이 들어요. 대학생 친구가 재수를 하는 친구에게 보내는 응원의 편지…… 나는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을까? 나는 이런 편지를 받을 수 있을까? 서로가 처한 상황이 다른데도 견고해지는 관계란 어떻게 맺는 걸까? 하는 건데요. 독자님의 편지함을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 역시 유명인의 서신 교환을 참고해 봤어요. 저의 눈에 들어오는 건 “모조리”라는 단어이군요…….
여성 연구자들 사이의 경쟁과 갈등도 전쟁에 가까웠지만, 자신을 인류학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남성 동료들과의 관계는 더욱 살벌했다. 보아스의 남성 제자들은 대부분 여성 참정권 운동을 지지하고 여권 신장을 옹호하는 지성인들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일부는 “과학으로 분류되던 학문 분야에 루스가 입문하는 것을 반대”했다. 베네딕트는 남성 동료 집단들의 교묘하고도 뿌리 깊은 여성 차별과 맞서는 방법을 미드에게 공유했다. “계획을 드러내는 데는 신중할 필요가 있어.” 베네딕트의 계획은 다름 아닌 ‘공부’였다. 학자에게는 저서가 신분증이었다.
베네딕트는 이 세상에 혼자서 이룰 수 있는 학문이란 없으며, 더군다나 인류학자는 현장 조사를 가야 할 때가 많기 때문에 그 어떤 분야보다도 동료들끼리의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미드와 베네딕트는 서로에게 가장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학문적 동반자가 되기로 약속했다. 미드는 베네딕트와의 협업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미국을 떠나 있을 때에는 그녀가 내 공백을 채워 주었고, 그녀가 미국을 떠나 있을 때에는 내가 그녀 대신 그 일을 맡았다. 우리는 서로의 저서, 논문을 서로 되풀이해서 읽었다. (……)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는 그녀가 쓴 것을 모두 다 읽었고, 그녀 역시 내가 쓴 것이라면 모조리 읽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최초의 독자이자 최고의 논평자 역할을 매우 성실하고도 훌륭하게 수행했다. “너의 논평은 아주 흥미로웠어.” “나는 그 논평이 아주 마음에 들었어.” 등등의 표현이 담긴 편지가 자주 오고 갔다. 하지만 논평의 내용은 찬사 일색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그들은 신뢰와 친분의 두터움만큼이나 날 선 비판을 유지했다. 상대방의 글을 읽은 후,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지며 희열을 느꼈다.
루스 베네딕트
때로는 기탄없이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1932년 8월에 베네딕트는 미드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내 책 제목을 무엇으로 할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어. 내가 인류학에 아주 밝은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제목이었으면 좋겠어. (……) 너는 무슨 좋은 아이디어 없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한계도 숨기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을 쓰겠다고 계획하기 전까지 내가 작업해 온 요점들이 하나의 동일한 윤곽 속으로 딱 맞아들어 간다는 것을 알지 못했어.” (……)
베네딕트는 1937년에 마침내 부교수에 임명되었지만, 인류학과가 소속되어 있었던 정치 대학의 교수들은 “여자가 그들과 똑같이 정교수 지위를 획득한다는 것은 학계 내에서 그들의 지위를 낮추는 일”로 받아들였다. 1948년 7월이 되어서야 베네딕트는 정교수가 되었다. 예순한 살 되던 해였다. 두 달 뒤인 1948년 9월에 베네딕트는 관상 동맥 혈전증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미드는 몇몇 지인들과 함께 베네딕트의 임종을 지켰다. 미드는 베네딕트가 남긴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다. 베네딕트를 추도하는 시간은 길게 이어졌다.
마거릿 미드
미드는 1974년에 베네딕트의 전기를 출간한다. 『루스 베네딕트』의 서문에서 미드는 집필 동기이자 목표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의 초창기 학자 생활은 루스 베네딕트의 시기와 거의 정확하게 겹친다. 그녀는 나보다 15세 연상이지만 인류학에 입문한 것은 나보다 3년 정도 앞설 뿐이다. 그녀가 학자 생활을 하는 내내 우리는 함께 일했다. 서로 자리를 비울 일이 있으면 상대방의 제자들을 대신 맡아 주었다. 또 현장에 나가 있을 때에도 자주 편지를 교환했다. 베네딕트의 문서는 친구인 마리 E. 에이첼버거가 정리하여 배서 대학 도서관에 보관 중인데, 나는 문서 관리자로서 모든 문서에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많은 편지와 일기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 자신의 언어로 직접 자신의 생애를 말하게 할 수 있었다.
미드가 쓴 서문은 마치 베네딕트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읽힌다. 자신에게 인류학자의 길을 열어 준 선배이자 친구 그리고 동료였던 베네딕트의 ‘문서 관리자’로서 미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했다. 인류학을 개척한 거장의 삶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기꺼이 맡기로 한다. 무엇보다 미드는 베네딕트에게 자신의 마음을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 글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제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겁니다.”라는 미드의 말 속에는 세상을 먼저 떠난 친구를 향한 애절한 그리움이 묻어 있다.
여성 연구자들 사이의 경쟁과 갈등도 전쟁에 가까웠지만, 남성 동료들과의 관계는 더욱 살벌했다는 부분이 눈에 들어와요. 이런 상황에서 뛰어난 개인으로서 모두의 위에 서겠다는 계획은 오히려 취약해지는 길이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끼리 반드시 협력해야만 살아남고 강해질 수 있는 것이겠죠. 우정은 이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드에서 생존하는 데 필수 요소였을지도요.
한편 같이 쓰고 공부하며 영향을 받고 성장하고 확산하는 여성 선배들의 이야기는 이번 ‘우정’에 실린 김정은의 「자기 언어를 찾는 방법」 속 ‘또 하나의 문화’ 동인 모임을 떠올리게 해요.
“이것이 우정이라는 방법의 생산성이다. 우리는 친구가 아닌 친구의 친구로 인해 새로운 세계와 인식으로 인도되며 자신의 언어를 갱신한다. 나의 친구가 하는 말은 사실 그 친구의 친구에게서 온 말일 수 있으며, 내가 친구의 말에 공명했던 순간 일어난 일은 친구의 친구와 공명한 일이기도 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김정은, 「자기 언어를 찾는 방법」, 《한편》 12호 ‘우정’ 중에서)
이렇게 생각하면 마거릿 미드와 루스 베네딕트의 관계는 단지 둘만의 것이 아니라 더욱 확산된 형태였으리라 생각하게 되어요. 이 둘의 우정의 자장으로부터 영향받은 또 다른 우정의 생산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