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와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조금은 수상한 두 사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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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문하생’이라 알고 지나치기엔 아까운 사람이 있다. 데라다 도라히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척 낯선 이름일 터다. 하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분명 이 인물을 알고 있다. 가령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등장하는, 다소 엉뚱한 물리학자 ‘미즈시마 간게쓰’를 기억하는가. 바로 데라다 도라히코를 모델로 삼은 등장인물이다.

데라다 도라히코는 물리학자이자 수필가, 영화광이자 애연가였고, 여행을 즐기며 미지의 꿈과 새로운 별을 탐구하는 모험가였다. 스승 나쓰메 소세키가 ‘전업 작가’였다면, 제자 데라다 도라히코는 철저히 ‘아마추어’였다. 오늘날 물리학자(과학자)가 에세이스트로서의 페르소나를 가진다는 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이 각종 수치와 그래프, 복잡한 공식으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은 ‘물리학자’가 써낸 글이라고 하면 어쩐지 호기심이 동한다. 실제로 다양한 이력을 지닌 데라다 도라히코의 수필은 그의 다채로운 면면을 제각각 반영하듯, 문단의 ‘인사이더’로서는 보여 줄 수 없는 ‘독특한 세계’를 풍부히 담고 있다. 이를테면 “과학과 예술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세계의 이치를 밝힌다.”라고 생각했던 데라다 도라히코는 진리에 이르는 긴긴 등산로 두 곳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던 것이다.

이제 데라다 도라히코라는 이름을 따로 기억해 두면 좋겠다. 아니, 단 한 편이라도 그의 글을 읽고 나면, 분명 그의 이름이 기억에 남을 것이다. 데라다 도라히코의 글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 버렸거나 혹은 알면서도 말로 다 풀어내지 못했던 목소리들…… 삶과 죽음, 운명과 기억, 아스라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들을 낯설지만, 충분히 친근한 방식으로 들려준다. 평범한 일상이 가장 새로울 수 있다는 사실만큼 경이로운 게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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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이라는 짧은 제목을 이 지면을 빌려 해부해 본다. 우선 ‘게으르다’라는 형용사가 있다. 이 책의 이해를 따르자면 게으름은 단순히 느리거나 움직이지 않는 버릇으로 치부되기 어렵다. 사회에서 인정해 주지 않는 많은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 역시 게으름의 발로인 까닭. 보통 산업 역군으로 죽도록 일하다 은퇴한 노년을 게으르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게으름이라는 비난의 화살을 받는 것, 요청하지 않은 계도의 과녁이 되는 것은 언제나 젊은이다. 그러므로 “게으른 자를 위한” 이 책은 젊은이들에게 바치는 격려임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변명……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수려하면서도 허심탄회한 문장은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 늘어놓는 구실이라기보다 그저 양해를 구하는 정도의 말끔한 액션이다. 우리가 혹은 당신이 고개를 젓더라도 그는 그냥 가던 길을 갔을 터다.(이것이 억측이 아님은 아래 글을 단서로 달아 ‘변명’한다.)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이 젊은이에게 다가가서 나눌 대화를 상상해 보자.

 

“아니, 젊은이, 여기서 뭐 하나?”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지금은 수업 받을 시간 아닌가? 지식을 쌓기 위해 부지런히 책을 파고들어야 하지 않나?”
“실례지만 저는 이렇게 배움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배움이라. 그래? 어떤 걸 하는가? 수학인가?”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형이상학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언어인가?”
“아뇨, 언어가 아닙니다.”
“상업인가?”
“상업도 아닙니다.”
“아니 그럼 대체 뭔가?”
“실은 선생님, 저는 곧 순례를 떠날 예정이라서 제 처지 사람들이 흔히 어떤 일을 하는지, 길 위의 어떤 진창과 덤불이 가장 불쾌한지, 어떤 종류의 지팡이가 가장 쓸모가 있는지 알아내고 싶습니다. 나아가 여기 물가에 누워서, 평화나 자족이라고 부르도록 스승께서가르치신 교훈을 속속들이 깨우치려 합니다.” —본문에서

연령 15~80세 | 출간일 2017년 4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