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차페크를 등에 업고 개와 고양이를 자랑했던 레터에 뜨거운 호응을 얻었습니다. “첫 뉴스레터를 받았어요. 따뜻하고 재미있고 귀엽습니다. 열심히 일하다 잠깐 쉬는 사이, 호로록 읽고 기분이 좋아졌어요.” “강아지와 고양이 사진 너무너무 좋아요 / 다음에도 실수인척 넣어주세요 너무 귀엽다” 아아아 추운 겨울이 춥지 않네요!!
혹시 오늘 레터의 제목 보셨나요? #199. 이것이 199번째 편지라는 뜻인데요. 200통째의 편지를 앞두고 한편 사람들은 개편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오늘은 개편 전 양식으로 쓰는 마지막 편지인 것이죠! 저는 지금의 양식도 좋은데…… 사노라면 존재의 양식을 바꾸는 일도 필요한 법이니까요. 최근 제가 본 책 중에서 자신의 존재양식을 바꾼 가장 인상적인 예를 같이 읽어 보실래요?
사회의 재난은 우리의 문제가 되었지만 정작 개개인에게 이러한 재난에 잘 반응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나는 환경재난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재난을 말할 자격을 자주 고민하게 된다. 내가 과연 이런 연구를 해도 되는 사람일까? 내가 뭐라고 사회의 재난을, 아픔을, 정의와 윤리를 이야기할까? 그렇게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이지 않은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
나는 대학원에서 환경문제의 사례와 이를 둘러싼 갈등과 정치를 강의한다. 하루는 한 학생이 매주 수업을 들을수록 고구마를 먹는 것 같은 답답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후로는 수업을 마무리할 때마다 괜히 말을 덧붙이게 되었다. “오늘도 고구마만 드린 것 같아 죄송하네요.” 대부분의 사회 문제는 인식하지 못하고 살면 편하다. 화나거나 슬프고 답답할 일도 없다. 강의실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말이다.
각각의 사례를 설명하다 보면 각자가 느끼는 막막함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수업 막바지에 이른다. 학생들은 환경문제를 대하는 주변 사람의 무관심한 태도나 정부의 정책 결정을 보면 화도 났다가 체념도 했다가 감정의 롤러코스터 상태를 오르내린다고 했다. 그래도 이런 감정을 다른 수강생과 나눌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한 학생이 손을 들고 평소 이런 감정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여러분과 비슷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해소한다고, 이러한 강의도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이라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답했다. 교수자로서 할 수 있는 상투적인 대답이었다.
그런 나의 복잡한 마음에 불쑥 뛰어 들어온 말이 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운동에 오랜 기간 참여해 온 활동가들을 인터뷰했을 때다. 지금도 많은 시민단체가 매년 불매운동 캠페인을 하고 있지만 2016년 전 국민이 동참한 옥시 불매운동만큼의 화력은 나오지 못한다. 나는 활동가들이 어떤 동력으로 캠페인을 이어 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재난이 터지고 시간이 흐른 뒤 관련 기사를 보면 ‘아직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느냐’라거나 ‘언제까지 같은 얘기를 계속할 것이냐’와 같은 댓글이 흔하다. 활동가들은 당연히 이런 반응을 알고 있다. 변하지 않는 현실의 막막함을 이야기하던 중 그가 2022년 한여름 서울 홍대 AK플라자 앞에서 있었던 일을 공유해 주었다.
애경 앞에서 〔캠페인을 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어요. 그런데 누가 우산 두 개를 가져다주는 거예요. 알고 보니 애경 옆에 있는 조그마한 가게 주인이 건네준 거였어요. 이 일이 상징성이 큰 게, 저희가 〔캠페인을 할 때〕 앰프 마이크 같은 것을 써서 30분에서 1시간씩도 떠들기 때문에 사실 인근 사람들은 시끄럽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구나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시끄럽고 싫어하는데 비 온다고 우산을 가져다주겠습니까. 진짜 너무 고맙더라고요. 우산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 동네에 와서 이렇게 한 번씩 떠드는데 그걸 주변에서 지켜봐 주는 분들이 계시구나 하는 점이요.
활동가는 지금도 캠페인을 할 때 음료수를 사다 준 사람들이 몇몇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2016년도처럼 어마어마하게 진행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하는 일을 이해하고 마음속으로 같이하는 사람이 있다.”라는 위안, 그런 사람이 많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하는 활동이 사람들의 공감을 사는 부분이 있나 보다 하는 생”이 그가 연대를 이어 갈 수 있는 원천이었다.
수십 년을 환경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활동가의 말과 수업에서 학생들과 나눈 이야기의 본질은 같았다. 나 말고도 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 사실이 우리를 위로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가 만든 틈이 언젠가는 우리를 변화시킨다. 같이 이야기할 사람이 있다면 나도 이야기를 계속하겠다는 자신감이 비로소 차올랐다.
『재난에 맞서는 과학』의 저자 박진영은 여러 해 동안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연구하면서 종종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왜 그런 연구를 하나요?” 그때마다 저자는 속으로 결정적인 계기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런 생각은 ‘내가 이런 연구를 할 만한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구요.
그리고 먼 길을 돌아와 비로소 차오르는 자신감…… “우리가 만든 틈이 언젠가는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런 오래 걸리는 변화는 마음을 건드려요. 사람이 진짜 변할 수 있는지, 나 자신이 변할 수가 있는지에 관해서 하나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탐구 시리즈 『재난에 맞서는 과학』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제가 알게 된 건 아주 느리지만 결코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변화가 사람에게도, 사회에게도 일어난다는 사실이예요.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원인 제공자의 책임을 묻는 단계에서도 아직 종결되지 않은 재난이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얹어 왔다. 의견과 질타와 지지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의 과학과 전문성을 변화시키고 있다.”(192쪽)
정답이 없는 문제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세계 한복판에 서게 되는 나. 이런 근대인(현대인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고 합니다!)의 변화에 대해서는 화제의 과학(사실 철학) 신간 브뤼노 라투르의 『존재양식의 탐구』가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죠.
그는 진정한 인류학자이다. 그는 긍정적 조사를 포기해서도 안 되며, 가치들을 정의하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그를 어딘가로 이끌 것이라는 확신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쨌든 그는 아주 어려운 탐구와 씨름하고 있다. 영역 관념이 적당치 않다면 연결망 관념 자체도 그렇다. 그러므로 그는 조금 더 나아가서 연결망들에서 순환하는 가치들을 규정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계속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근대인을 재정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이다. — 그는 이제 이를 확신한다. 가치, 영역, 제도, 연결망 사이에서 근대인이 확립한 관계가 아무리 얽혀 있다고 해도, 우리 인류학자가 주의를 돌려야 할 곳은 바로 여기다. 그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자신이 이미 현장조사에서 연결망들의 움직임과 공통점이 있는 행위 과정들을 마주쳤다는 우연한 깨달음이다. 즉, 그런 행위 과정들 또한 불연속성을 도입함으로써 통과를 정의한다. 그것이 그의 진정한 “유레카” 순간이다.
리트리버 편집자님이 발췌한 『재난에 맞서는 과학』 대목은 매번 제 가슴을 울려 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재난에 관한 논의가 정말 많아졌지만, 각각의 사례를 어떻게 소화할지는 여전히 막막한 문제예요. 비슷한 재난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지만 뉴스 기사로 전달되는 현실은 ‘고구마’일 따름입니다.
현재 진행형인 재난을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방향을 애타게 찾던 와중, 저에게 같은 문단이 ‘유레카’ 순간으로 다가왔어요. “나 말고도 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 사실이 우리를 위로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가 만든 틈이 언젠가는 우리를 변화시킨다. 같이 이야기할 사람이 있다면 나도 이야기를 계속하겠다는 자신감이 비로소 차올랐다.” 저자가 자신의 현장에서 활동가의 말과 학생의 말을 연결 짓고 하나의 문장을 자아낸 것처럼, 편집자인 저는 『재난에 맞서는 과학』이라는 책을 편집하고 문장에서 뿜어져 오는 저자의 에너지와 마주치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습니다.
인간 존재의 변화란 사소한 깨달음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앞으로 ‘탐구’ 북토크에서 만날 독자와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한편의 레터양식 개편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기대되는 연말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