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소개해 드린 탐구 시리즈의 신간 『이미지란 무엇인가』에 대한 반응이 뜨거워요. “많은 깨달음을 주는 글 감사합니다. ” “『이미지란 무엇인가』 사면서 『온라인의 우리 아이들』이랑 『우리를 바꾸는 우리』까지 사 버렸어요. 이 구역 탐구 처돌이 나야 나~!~” 모두 감사합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작품은 『좁은 문』, 『지상의 양식』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의 소설 『팔뤼드』예요. 작품과 같은 제목의 소설 『팔뤼드』를 쓰고 있는 주인공의 일상이 담겨 있습니다. 완성되지 않은 소설, 소설이 되기 전의 문장들, 하루하루 해야 할 일과 한 일을 적은 메모까지 다양한 형식의 글들이 소설 속에 녹아 있는데요. 소설 속 소설 『팔뤼드』의 여러 장들로 나누어진 구성부터 독자의 참여를 통해서 완성되는 공백까지, 새로운 형식들에 놀라면서 읽었어요.
함께 읽을 부분은 친구에게 자신이 쓰고 있는 작품 『팔뤼드』와 매일매일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에요. 쉽지 않은 대화가 웃기다가도 답답하고 별안간 슬퍼지기도 하네요.
화요일
5시쯤 날이 선선해졌다. 나는 창문을 닫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6시에 절친한 친구 위베르가 들어왔다. 승마 연습장에서 오는 길이었다.
“뭐야! 작업하는 거야?”
“『팔뤼드』를 쓰고 있어.”
“그게 뭐지?”
“책.”
“내 취향에 맞으려나?”
“아니.”
“너무…… 지적인 거야?”
“지루해서.”
“그렇다면 왜 쓰는 거야?”
“내가 아니면 누가 쓰겠어?”
“이번에도 고백담이야?”
“아닐걸.”
“그렇다면 뭐야?”
“앉아 봐.”
그가 자리에 앉자, 내가 말했다.
“베르길리우스의 시구 두 줄을 읽었어.
Et tibi magna satis quamvis lapis omnia nudus Limosoque palus obducat pascua junco.
번역하면 이래. 어떤 목동이 다른 목동에게 말하는 거야. 분명 자기 밭이 돌멩이와 늪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참 좋다고. 그리고 그런 것들이 만족스러워서 아주 행복하다고 말하지. 밭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보다 더 현명한 생각은 없겠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말이 없는 위베르…… 하지만 화자는 말을 이어 갑니다. “『팔뤼드』는 무엇보다 떠날 수 없는 자에 관한 이야기야…….” 하고요. 위베르는 “알아들었어, 친구, 계속 잘 써 봐.”라고 말하고 떠나 버리는데요. 친구가 저렇게 제 이야기를 끊고 가 버린다면 저는 무척 속상할 것 같은데…… 혹은 ‘늪으로 둘러싸인 망루에 사는 한 독신자 이야기’에 대해 말할 친구가 있다는 데에 감사해야 할까요?
아래 대목의 고약하게 망해 버린 대화를 읽다 보면 넋이 나가고 힘이 쭉 빠진 화자가 안쓰러운 한편 사람들의 답답함도 이해가 됩니다. 아무래도 친구가 내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을 때,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야만 할 것 같을 때, 어떤 선택을 하시나요? 처음부터 대화를 시작한다…… 다른 방식을 고민한다…… 다른 친구를 찾아간다…….
“그래서 도대체 당신 불만이 뭐요?” 탕크레드와 가스파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불만을 품지 않는 것이 불만이죠! 악을 감수하는 게 악을 더 나쁘게 합니다. 악습이 되니까요, 선생님들. 왜냐면 결국엔 그걸 즐기게 되거든요. 그게 불만입니다, 선생. 반항하지 않는 것 말입니다. 예컨대 라타투유를 먹고 맛있게 먹은 척하기, 40수짜리 식사를 하고 멋진 표정을 짓기, 무언가에 맞서 반항하지 않는 것이 불만이라고요.”
“오! 오! 오! 그럼 당신은 혁명주의자인가요?” 여럿이 한꺼번에 말했다.
“전혀 아니에요, 선생님들, 전 혁명가가 아닙니다! 당신들은 제가 말을 끝내게 내버려 두질 않는군요. 제 말은…… 다들 마음속에서…… 반항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제가 불만을 품는 건 분배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자신에게 불만이 있어요. 관습에 불만을 품는 거라고요.”
소란이 일었다. “결국, 선생, 당신은 자기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질책하는 거군요. 한편으로 당신은 그들이 다르게 살아갈 수 있음을 부정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걸 행복해하는 그들을 질책하는 거고요. 어쨌든 그들이 그렇게 사는 게 좋다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결국 이봐요, 당신은 도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나는 땀에 흠뻑 젖은 채 완전히 넋이 빠져 버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제가 원하는 거요? 선생님들, 제가 원하는 것은요, 제가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은, 『팔뤼드』를 마저 쓰는 겁니다.”
그 순간 니코뎀이 무리에서 튀어나오더니 내 손을 잡고는 소리쳤다.
“아! 선생, 당신은 정말 잘할 겁니다!” 그 순간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등을 돌렸다.
“당신이 어떻게 알지요?”
“몰라요. 어쨌든 친구 위베르한테 많이 들었어요.”
“아! 위베르가 얘기했군요.”
“맞아요, 선생. 낚시하는 사람 얘긴데, 낚싯줄에 미끼를 매다는 대신, 자기가 먹을 만한 아주 튼실한 벌레를 진흙 속에서 찾는 사람의 이야기라고요. 물론 그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고…… 당연하죠. 제 생각엔 아주 재미난 이야기 같군요!”
위베르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또다시. 아! 힘이 쭉 빠진다! 그들에게 이해시키고 싶었던 바로 그것을 설명해야 한다니!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니! 매번! 다들 뭐가 뭔지 모른다. 어리둥절해한다. 더는 못 하겠다. 아! 이미 얘기를 해 줬건만…….
아아, 말이 없는 위베르…… 알아들었다면서 딴 얘기를 전한 위베르…… 그렇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또 다른 친구에게 책 얘기를 전한 게 그래도 고맙지 않은가요. 위베르에게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단 하나예요. 왜 질문하지 않은 거야? ‘네 책은 그럼 이러이러한 얘기인 거야?’라고 질문을 던졌어야지!(어차피 말이 안 통한다고 하지마!)
저는 요즘 질문하기에 빠져 있는데요. 망한 대화를 구할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에요. 뭔가 대화가 ‘대화를 위한 대화’로 빠져들 때,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으면서(“지금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뭐야!”) 대화를 포기하지도 않는(“맞아맞아, 네 말이 다 맞아……”) 방법이 질문하기 아닐까요. 이때 질문하기란…… ‘잘 질문하기’보다 ‘질문을 시작하기’에 방점이 있어요. 대화의 교본이라고 할 수 있는『나의 덴마크 선생님』에서 한 대목을 읽어 볼까요?(⬅⬅ 이 링크를 클릭해서 온라인서점 ‘모이’의 큐레이션도 확인해 보세요!)
비판적 교육과 민주주의 수업은 차 선생님과 클라우스 선생님이 공동으로 진행한다. 클라우스 선생님은 한국에서 태어나 덴마크로 입양되어 자랐는데, 철학과 신학을 전공했다. 두 선생님은 강의를 하지 않을 때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강의실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다. 오늘은 클라우스 선생님이 단독으로 수업하는데, 시작한 지 5분이 지나도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자 선생님 특유의 장중한 스타일로 일장 연설을 토해 낸다.
“수업 10분 전, 나는 수업에 대한 열정으로 불탄다. 그런데 수업이 시작되었는데도 학생들이 오늘처럼 반 정도밖에 출석하지 않았을 때 이보다 더 절망스러운 상황이란 내 삶에 없다. 물론 나는 살면서 큰 상실을 겪어 보았다. 그렇지만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학생들이 오지 않는 상황은 여전히 나를 낙담시킨다.”
보아하니 수업이 바로 시작될 것 같지 않아서 나는 손을 들고 물어본다.
“질문을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중략)
그는 수업 시간에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어떤 교사가 좋은 교사고, 어떤 교사가 나쁜 교사일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네 인생의 목표를 결정하는 사람은 누구냐? 너 자신이라고? 왜 너 자신이 네 인생의 목표를 결정하지?’ 질문은 근본적이고, 나는 그런 질문을 작은 폭죽처럼 연신 터뜨리는 그의 수업이 좋다.
쉬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러 커먼룸에 가는 선생님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클라우스, 내가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고 있나요?”
“네 생각은 어때? 수업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니?”
“한 60퍼센트 정도?”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맞을 거야. 내 질문에 네가 하는 대답은 거의 다 틀리지만 말이야.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에 깨닫는다. 아하, 내가 질문을 시작했구나. 내가 언어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